[70년만의 무공훈장]④ "어디 묻히셨는지도 몰랐는데…자랑스러운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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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씨, 70년 만에 아버지의 묘지 찾고 무공훈장도 받아
나항렬 씨는 훈장찾기 조사단·외교부 협업 덕에 할아버지 무공훈장 찾아
후손들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우리에겐 존경스러운 멋진 영웅"
70년만의 무공훈장 / 연합뉴스 (Yonhapnews)
탐사보도팀 = 지난해 6월 4일 국립서울현충원. 김종태(71) 씨는 아버지 고(故) 김윤식 일등중사(하사)의 묘비 앞에서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 신기진 조사단장(대령)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과 아버지 복무기록이 정리된 공훈록을 받아 들었다.
갓난아기일 때 헤어져 70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한 김 씨는 아버지의 묘비에 무공훈장을 바치며 눈물을 흘렸다.
김 씨는 지난 30여 년간 6·25 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아버지의 묘지를 찾게 된 데는 조사단의 도움이 컸다.
지난 2019년 창설된 조사단은 6·25 참전용사 중 무공훈장을 수령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 훈장을 수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김 씨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낸 것이다.
김 씨는 "아버지 묘지 앞에서 무공훈장을 대신 받았을 때 제 일생 최대의 기쁨과 감격을 느꼈다"며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정확한 날짜를 알게 됐으니 그 날짜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됐다"고 감격스러워했다.
◇ 갓난아기 때 헤어진 아버지, 무공 세우고 전사…아들, 칠순노인 되어 묘비 앞에 서다 김윤식 일등중사는 스무 살 아내와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을 남겨두고 스물일곱 살이었던 1950년 9월 9일 육군 수도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
당시 수도사단은 북한군 12사단 등을 격퇴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김 일등중사의 입대 직후인 9월 16일부터 수도사단은 3사단과 함께 반격 작전으로 전환해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다.
이어 원산, 함흥, 성진, 청진을 점령한 뒤 11월 30일에는 한반도 최북단인 부령, 부거까지 진격했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에서 철수한 수도사단은 양양 방어 전투, 향로봉지구 전투, 서화리 동북방 전투, 월비산 전투 등을 치렀다.
김 일등중사는 강원 김화군 금성천 전방지역 전투에서 싸우다가 1952년 7월 3일 전신에 포탄 파편상을 입고 전사했다.
정부는 김 일등중사의 유골을 국립현충원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이름을 새겨 추모했다.
입대 후 사망까지 2년 가까운 기간에 김 일등중사는 치열한 전투를 연달아 치르느라 집에 편지 한 통만을 보낼 수 있었다.
아들 김종태 씨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야 아버지가 6·25 전쟁 때 전사했다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전사 소식은 큰아버지에게 공식 통보됐지만, 유품이나 유해는 전달되지 못했다.
이에 김 씨는 정부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대구의 한 대학 교직원으로 취직한 뒤 결혼해 가정을 꾸린 김 씨는 아내 최윤선(65) 씨와 함께 1980년부터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나섰다.
대구시청, 국가보훈처, 국립현충원, 국방부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김 씨는 "예전에는 기관에 접근하기도 어려웠고, 행정도 뒤떨어졌을 때라 자료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전했다.
3년 전에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으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진행하는 유전자 시료 채취를 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연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없다고 본 김 씨는 자신이 살던 대구시 충혼탑에 아버지의 위패를 만들어 달라고 정부에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이후 김 씨의 가족은 매년 대구시 충혼탑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2월 아내 최 씨가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하는 '나라사랑신문'을 보고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의 존재를 알게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아버지의 수훈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연락했다.
조사단은 김 일등중사가 1954년 9월 30일 화랑무공훈장 수여자로 결정됐으나, 훈장이 수여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김 씨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사단은 탐문 끝에 김 일등중사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는 것을 알아냈다.
알고 보니 묘비에 적힌 아버지 성함(김준식)과 실제 아버지 성함(김윤식)이 달랐던 것이다.
김 씨는 유전자 검사 결과와 각종 증명 서류를 제출해 지난해 5월 아버지 묘비에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드릴 수 있었다.
최 씨는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의 한 화장터에서 시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한 뒤 현충원에 안장했는데, 당시 묘비에 이름이 잘못 적혔던 것"이라며 "현충원 명단에서 '김윤식'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시아버지 묘비를 찾고 보니 묘비에 적힌 군번이 저희가 아는 것과 일치했다"고 말했다.
김 씨 부부와 두 자녀는 김 이등중사의 묘비를 찾은 후 명절과 현충일마다 찾아가고 있다.
김 씨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던 자녀들에게 할아버지가 나라에 큰 업적을 세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조사단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사단은 무공훈장뿐 아니라 유가족이 애타게 찾는 참전용사의 묘지를 찾아주기도 한다.
지난 2월부터는 외교부와 협업해 국외에 거주하는 수훈자나 유가족의 무공훈장을 찾아주고 있다.
외교부는 해외 주재 대사관이나 영사관 홈페이지에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안내하고, 재외동포재단을 통해 무공훈장을 전달한다.
조사단이 외교부와 협업을 추진한 지 한 달 만인 지난 3월 첫 성과를 거둬 고(故) 나은철 이등중사(하사)의 무공훈장을 해외에 있는 유족에게 전달했다.
◇ 캐나다에 사는 손자, 할아버지 무공훈장을 71년 만에 찾다
나은철 이등중사는 전북 김제에서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 당시 징집되면 대부분 장남을 제외하고 동생들이 입대하는 분위기였지만, 나 이등중사는 "내가 입대할 테니 동생들은 자유롭게 살도록 해달라"며 자신이 입대했다.
입대 당시 나 이등중사의 나이는 24살로, 두 살배기 아들과 아내가 있었다.
휴가를 나왔을 때 아들을 안아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상황이 급박하니 서둘러 복귀하라"는 연락이 왔다.
급하게 부대로 복귀하던 뒷모습이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이다.
나 이등중사는 1950년 9월 2일 북한군의 공세를 막다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장남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 이등중사의 어머니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자 보다 못한 남편이 담배를 권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 이등중사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담배에 의지했고, 아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1964년에는 나 이등중사의 아내마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들은 고아로 남겨졌다.
나 이등중사 내외는 고향의 산기슭에 묻혔다.
나 이등중사의 아들 나희집(73) 씨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잘 크기만을 바라는 조부모의 간절함에 부응하듯 건강하게 자라 가정을 이뤘다.
나희집 씨도 아들을 낳았다.
그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6·25 참전용사였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손자 나항렬(50) 씨는 2006년 미국으로 박사 과정을 밟으러 떠나기 전 '할아버지께서 6·25 전쟁에서 전사하신 분이라면 국립묘지에 모실 길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의 면사무소, 육군본부, 국립현충원 등에 문의한 결과 할아버지 내외를 국립현충원에 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육군의 안장식을 거쳐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두 분을 모셨다.
나 씨는 "두 분을 국립묘지로 이장할 때 국가와 개인, 순국과 역사의 의미 등을 깊이 되새기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나 씨는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뒤 캐나다의 교육연구기관으로 적을 옮겼다.
지난 3월 말 토론토 영사관 홈페이지를 살펴보던 중 '6·25 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아주기 사업' 안내를 보게 됐다.
그는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반가운 마음에 찾아보니 사업 홈페이지가 별도로 있었다"며 "거기서 검색하다가 제 할아버지와 성함이 비슷한 분(라온철)이 계신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혼란스러운 행정 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이름을 잘못 기재하는 오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사단으로 연락했다.
예전에는 나씨 성을 '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 씨는 조사단에 관련 내용과 할아버지 군번이 담긴 이메일을 보냈다.
이후 나 씨는 할아버지의 호적등본 등 몇 가지 서류를 더 보냈고, 조사단은 여러 기록 등을 대조해 이름이 잘못 기재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사단에 따르면 이처럼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최초 기록이 잘못된 경우도 있고, 한자 기록을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경우, 아명(兒名)과 혼용한 경우, 출생일과 호적상의 생일이 다른 경우 등도 많다고 한다.
나 씨는 할아버지가 무공훈장 수훈자라는 사실을 최종 통보받았다.
아이를 많이 낳길 원해 다섯 자녀의 부모가 된 나 씨 부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소회를 전했다.
"저희에게 할아버지는 존경스럽고 멋진 영웅이십니다.
가끔 전사하신 할아버지의 관점에서 저희 가정을 생각해볼 때가 있어요.
'어린 아들 하나 남겨놓고 떠났는데, 손자 부부가 자식을 많이 낳았구나'라고 기뻐하시며 칭찬하실 것 같은 상상이 됩니다.
"
[탐사보도팀: 권선미·윤우성 기자, 정유민 인턴기자]
/연합뉴스
나항렬 씨는 훈장찾기 조사단·외교부 협업 덕에 할아버지 무공훈장 찾아
후손들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우리에겐 존경스러운 멋진 영웅"
갓난아기일 때 헤어져 70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한 김 씨는 아버지의 묘비에 무공훈장을 바치며 눈물을 흘렸다.
김 씨는 지난 30여 년간 6·25 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아버지의 묘지를 찾게 된 데는 조사단의 도움이 컸다.
지난 2019년 창설된 조사단은 6·25 참전용사 중 무공훈장을 수령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 훈장을 수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김 씨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낸 것이다.
김 씨는 "아버지 묘지 앞에서 무공훈장을 대신 받았을 때 제 일생 최대의 기쁨과 감격을 느꼈다"며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정확한 날짜를 알게 됐으니 그 날짜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됐다"고 감격스러워했다.
◇ 갓난아기 때 헤어진 아버지, 무공 세우고 전사…아들, 칠순노인 되어 묘비 앞에 서다 김윤식 일등중사는 스무 살 아내와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을 남겨두고 스물일곱 살이었던 1950년 9월 9일 육군 수도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
당시 수도사단은 북한군 12사단 등을 격퇴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김 일등중사의 입대 직후인 9월 16일부터 수도사단은 3사단과 함께 반격 작전으로 전환해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다.
이어 원산, 함흥, 성진, 청진을 점령한 뒤 11월 30일에는 한반도 최북단인 부령, 부거까지 진격했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에서 철수한 수도사단은 양양 방어 전투, 향로봉지구 전투, 서화리 동북방 전투, 월비산 전투 등을 치렀다.
김 일등중사는 강원 김화군 금성천 전방지역 전투에서 싸우다가 1952년 7월 3일 전신에 포탄 파편상을 입고 전사했다.
정부는 김 일등중사의 유골을 국립현충원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이름을 새겨 추모했다.
입대 후 사망까지 2년 가까운 기간에 김 일등중사는 치열한 전투를 연달아 치르느라 집에 편지 한 통만을 보낼 수 있었다.
아들 김종태 씨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야 아버지가 6·25 전쟁 때 전사했다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전사 소식은 큰아버지에게 공식 통보됐지만, 유품이나 유해는 전달되지 못했다.
이에 김 씨는 정부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대구의 한 대학 교직원으로 취직한 뒤 결혼해 가정을 꾸린 김 씨는 아내 최윤선(65) 씨와 함께 1980년부터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나섰다.
대구시청, 국가보훈처, 국립현충원, 국방부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김 씨는 "예전에는 기관에 접근하기도 어려웠고, 행정도 뒤떨어졌을 때라 자료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전했다.
3년 전에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으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진행하는 유전자 시료 채취를 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연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없다고 본 김 씨는 자신이 살던 대구시 충혼탑에 아버지의 위패를 만들어 달라고 정부에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이후 김 씨의 가족은 매년 대구시 충혼탑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2월 아내 최 씨가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하는 '나라사랑신문'을 보고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의 존재를 알게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아버지의 수훈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연락했다.
조사단은 김 일등중사가 1954년 9월 30일 화랑무공훈장 수여자로 결정됐으나, 훈장이 수여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김 씨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사단은 탐문 끝에 김 일등중사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는 것을 알아냈다.
알고 보니 묘비에 적힌 아버지 성함(김준식)과 실제 아버지 성함(김윤식)이 달랐던 것이다.
김 씨는 유전자 검사 결과와 각종 증명 서류를 제출해 지난해 5월 아버지 묘비에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드릴 수 있었다.
최 씨는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의 한 화장터에서 시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한 뒤 현충원에 안장했는데, 당시 묘비에 이름이 잘못 적혔던 것"이라며 "현충원 명단에서 '김윤식'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시아버지 묘비를 찾고 보니 묘비에 적힌 군번이 저희가 아는 것과 일치했다"고 말했다.
김 씨 부부와 두 자녀는 김 이등중사의 묘비를 찾은 후 명절과 현충일마다 찾아가고 있다.
김 씨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던 자녀들에게 할아버지가 나라에 큰 업적을 세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조사단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사단은 무공훈장뿐 아니라 유가족이 애타게 찾는 참전용사의 묘지를 찾아주기도 한다.
지난 2월부터는 외교부와 협업해 국외에 거주하는 수훈자나 유가족의 무공훈장을 찾아주고 있다.
외교부는 해외 주재 대사관이나 영사관 홈페이지에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안내하고, 재외동포재단을 통해 무공훈장을 전달한다.
조사단이 외교부와 협업을 추진한 지 한 달 만인 지난 3월 첫 성과를 거둬 고(故) 나은철 이등중사(하사)의 무공훈장을 해외에 있는 유족에게 전달했다.
◇ 캐나다에 사는 손자, 할아버지 무공훈장을 71년 만에 찾다
나은철 이등중사는 전북 김제에서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 당시 징집되면 대부분 장남을 제외하고 동생들이 입대하는 분위기였지만, 나 이등중사는 "내가 입대할 테니 동생들은 자유롭게 살도록 해달라"며 자신이 입대했다.
입대 당시 나 이등중사의 나이는 24살로, 두 살배기 아들과 아내가 있었다.
휴가를 나왔을 때 아들을 안아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상황이 급박하니 서둘러 복귀하라"는 연락이 왔다.
급하게 부대로 복귀하던 뒷모습이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이다.
나 이등중사는 1950년 9월 2일 북한군의 공세를 막다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장남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 이등중사의 어머니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자 보다 못한 남편이 담배를 권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 이등중사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담배에 의지했고, 아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1964년에는 나 이등중사의 아내마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들은 고아로 남겨졌다.
나 이등중사 내외는 고향의 산기슭에 묻혔다.
나 이등중사의 아들 나희집(73) 씨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잘 크기만을 바라는 조부모의 간절함에 부응하듯 건강하게 자라 가정을 이뤘다.
나희집 씨도 아들을 낳았다.
그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6·25 참전용사였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손자 나항렬(50) 씨는 2006년 미국으로 박사 과정을 밟으러 떠나기 전 '할아버지께서 6·25 전쟁에서 전사하신 분이라면 국립묘지에 모실 길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의 면사무소, 육군본부, 국립현충원 등에 문의한 결과 할아버지 내외를 국립현충원에 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육군의 안장식을 거쳐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두 분을 모셨다.
나 씨는 "두 분을 국립묘지로 이장할 때 국가와 개인, 순국과 역사의 의미 등을 깊이 되새기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나 씨는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뒤 캐나다의 교육연구기관으로 적을 옮겼다.
지난 3월 말 토론토 영사관 홈페이지를 살펴보던 중 '6·25 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아주기 사업' 안내를 보게 됐다.
그는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반가운 마음에 찾아보니 사업 홈페이지가 별도로 있었다"며 "거기서 검색하다가 제 할아버지와 성함이 비슷한 분(라온철)이 계신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혼란스러운 행정 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이름을 잘못 기재하는 오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사단으로 연락했다.
예전에는 나씨 성을 '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 씨는 조사단에 관련 내용과 할아버지 군번이 담긴 이메일을 보냈다.
이후 나 씨는 할아버지의 호적등본 등 몇 가지 서류를 더 보냈고, 조사단은 여러 기록 등을 대조해 이름이 잘못 기재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사단에 따르면 이처럼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최초 기록이 잘못된 경우도 있고, 한자 기록을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경우, 아명(兒名)과 혼용한 경우, 출생일과 호적상의 생일이 다른 경우 등도 많다고 한다.
나 씨는 할아버지가 무공훈장 수훈자라는 사실을 최종 통보받았다.
아이를 많이 낳길 원해 다섯 자녀의 부모가 된 나 씨 부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소회를 전했다.
"저희에게 할아버지는 존경스럽고 멋진 영웅이십니다.
가끔 전사하신 할아버지의 관점에서 저희 가정을 생각해볼 때가 있어요.
'어린 아들 하나 남겨놓고 떠났는데, 손자 부부가 자식을 많이 낳았구나'라고 기뻐하시며 칭찬하실 것 같은 상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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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팀: 권선미·윤우성 기자, 정유민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