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모 연출 "노동 상실은 결국 문화적 공황 상태로 이어져"
미국사회 통해 바라본 우리 노동현실과 인종차별…연극 '스웨트'
2000년대 초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철강산업 도시 레딩의 한 바(BAR). 산업재해로 일을 그만둔 스탠이 바텐더로 일하는 곳이다.

그는 공장 노동자들의 친구이자 연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이 바의 단골인 신시아와 트레이시는 같은 공장에서 20년 넘게 '기름밥'을 먹은 사이. 하지만 신시아가 관리직으로 승진하면서 막역했던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회사는 공장을 멕시코로 이전해 인건비를 줄이려 하고, 노조가 이에 맞서는 사이 생산 라인은 인건비가 싼 라틴계 노동자들이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쉼터이자 축제의 공간이었던 바는 싸움터로 변하고, 전쟁터가 되고 만다.

17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전막 시연으로 선보인 연극 'SWEAT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이하 '스웨트')은 극작가 린 노티지의 2017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노동이 돈으로만 평가되는 현실과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문제를 다룬다.

작품은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일을 빼앗겼을 때 느끼는 공허함과 분노,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무가치함을 보여주며 노동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한국 사회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미국사회 통해 바라본 우리 노동현실과 인종차별…연극 '스웨트'
안경모 연출은 이날 전막 시연 후 가진 인터뷰에서 "노동의 상실은 단지 경제활동의 중단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문화적인 활동을 파괴하며 결국 문화적인 공황 상태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작품은 노동 현장에서의 인종차별 문제도 이야기한다.

평소 투명인간 취급받던 라틴계가 공장의 생산라인을 차지하며 기존 노동자들과의 갈등은 첨예해지고, 결국 이런 상황은 인간의 존엄까지 벼랑 끝으로 내몬다.

안 연출은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만큼 인종에 대한 편견이 강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 작품은 인종 갈등 문제가 우리에게도 시한폭탄처럼 첨예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비 신호탄"이라고 말했다.

스탠 역을 맡은 배우 박상원은 "작년 모노드라마를 하면서 배우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게 그리웠는데, 이번에는 바텐더 역할이어서 극과 극의 상황"이라며 "배우로서 대한민국 연극 역사의 산실 같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어 행복하고 영광"이라고 출연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스탠은 가난한 백인으로 흑인 친구와 희망을 갈구하는 이민자 등을 모두 보듬는 역할"이라며 "모든 반목을 포용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 배가 나온 것처럼 꾸미고, 수염도 붙였다"고 설명했다.

미국사회 통해 바라본 우리 노동현실과 인종차별…연극 '스웨트'
트레이시는 갈등의 중심에서 모순되고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백인 노동자로서 나름의 기득권을 갖고 있다가 해고에 직면하며 거칠어지고 약자에 폭력적으로 된다.

트레이시 역의 강명주는 "트레이시가 관객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약간 걱정했다"면서 "이 사람도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그렇게 변화된 사람이어서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노동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이 그것이 지워졌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는 부분이 공감이 가는 요소일 것 같다"고 말했다.

송인선이 연기하는 신시아는 생산라인에서 관리직으로 승진하면서 노조 측에 있는 친구들과 회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그는 "노동과 사람이란 주제는 사실 보편성을 띠고 있는데, 미국이 배경인 이 작품이 한국 관객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궁금하다"고 했다.

한편 극 중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무대 위 화면에는 2000년 경제 호황과 빈부격차의 심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미국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뉴스가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실업률이 30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 2000년에 레딩의 공장에서는 인원 감축 계획이 진행된다.

이런 설정은 레딩이란 미국의 도시가 지금의 한국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오는 7월 1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는 영문 자막이 제공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