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회유·압박 의한 증인 진술변경 가능성 배제불가"…추가심리 지시
추가재판 통한 증언 '오염여부' 확인 요구…'오염됐다' 단정한 건 아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뇌물 수수 혐의 사건에 대한 최근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는 '무죄'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가 지난 10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차관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는데, 이에 대한 언론 보도가 약간 엇갈리고 있다.
다수 매체가 "대법원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파기환송' 소식을 전했는데, 일부 매체는 같은 판결을 다룬 기사에 '무죄 취지'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한 일간지는 관련 기사 제목에 '김학의 무죄'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파기환송은 대법원이 보기에 원심 재판 과정이나 법리 적용 등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니 더 따져보라는 것인데, 여기에 '무죄 취지'가 붙으면 유죄로 본 원심 판단 자체가 잘못됐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같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언론 보도에서 '무죄'라는 표현을 쓴 언론사와 그렇지 않은 언론사로 갈린 배경은 무엇일까?
◇'무죄 취지'는 법률 용어 아닌 판결에 대한 언론의 해석
우선 '무죄 취지'는 판결문이나 법조문에 등장하는 법률 용어가 아니라 언론이 대법원의 판결을 자체적으로 해석해 내놓는 표현이다.
언론은 대법원이 파기환송 판결에서 유·무죄에 대한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냈다고 판단하면, '유죄 취지' 혹은 '무죄 취지'라고 쓴다.
재판 관련 기사를 쓸 때 언론은 결과를 예단하지 않고, 내용(판결문)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는 측면에서 타 분야 기사 작성시에 비해 더욱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언론이 파기환송 기사에서 재판부가 쓰지도 않은 유·무죄 '취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대법원 판결에 기속력(羈束力)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속력이란 임의로 대법원 판결을 철회하거나 변경할 수 없는 구속력을 뜻한다.
법원조직법 제8조는 '상급법원 재판에서의 판단은 해당 사건에 관하여 하급심을 기속한다'고 상급심 재판의 기속력을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을 하면서 하급심의 유죄 판단 또는 무죄 판단이 잘못됐다고 명백하게 지적할 경우 하급심 재판부가 그 판단을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 언론도 파기환송심 재판부의 판단 내용을 토대로 '유죄 취지', 또는 '무죄 취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 "유·무죄 판단 아냐"…파기환송심서 결과 예단 안해
그렇다면 이번에도 김 전 차관 사건을 '무죄 취지'로 돌려보냈다고 보도하기 충분할 만큼 대법원 재판부의 판단이 명확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연합뉴스가 이번 사건 대법원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대법원이 문제 삼은 부분은 원심 판단의 근거가 된 증인 법정진술의 신빙성이다.
해당 증인은 건설업자 최모씨로 김 전 차관은 최씨로부터 2003∼2011년 5천100여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김 전 차관에 무죄·면소 판결을 내렸으나, 2심은 최씨의 법정진술을 근거로 4천300여만 원에 대한 대가성을 인정해 일부 유죄로 판단했다.
이에 김 전 차관 측은 최씨가 법정진술에 앞서 검사와 면담한 점을 지적하며 상고했고,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대법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회유나 압박, 답변 유도나 암시 등의 영향을 받아 종전에 한 진술을 공소 사실에 부합하는 진술로 변경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원심판결에는 검사의 사전면담이 이루어진 증인의 법정진술의 신빙성 판단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즉, 유·무죄 판단의 근거가 된 증인 최씨의 법정진술이 검사와의 사전 면담에 영향을 받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으니, 재판을 다시 열어 최 씨의 진술이 '오염'되지 않았는지 따져보라는 취지다.
일부 언론사는 대법원이 원심에서 유죄 판단의 근거가 된 증인 진술의 신빙성을 지적한 부분을 들어 '무죄 취지'로 해석했지만 엄밀히 말해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는 진술이 검찰의 회유나 압박에 의해 오염됐는지 여부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이번에 대법원 재판부가 '진술이 오염됐다'고 직접 판단했다면 그것은 최근 판결 추세로 미뤄 '무죄 취지'라고 볼 여지가 크지만 이번 취지는 오염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심리를 더 하라는 쪽이었던 만큼 이를 '무죄 취지'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작지않아 보인다.
우선 대법원 측은 이번 판결이 유·무죄 중 한쪽으로 판단 내린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피고인의 유무죄 여부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검사가 증인을 사전면담한 이후 이뤄진 증언의 신빙성 및 그 판단 기준에 관해 새 법리를 제시하고 그에 대해 추가로 재판을 해보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는 파기환송심에서 검찰이 최씨 진술의 진실성, 즉 오염되지 않았다는 점을 얼마나 잘 입증하느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검찰이 입증에 실패할 경우 김 전 차관에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전문가들 "'무죄 취지'로 보기 어려워"…"공판중심주의 강조한 것"
연합뉴스가 접촉한 복수의 전문가들도 이번 김 전 차관에 대한 대법원 판단을 '무죄 취지'로 단정하는데는 신중한 견해를 피력했다.
김희균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강조한 것이지 (김 전 차관의) 유·무죄에 대한 판단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형사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 판사가 직접 들은 증인 진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공판중심주의"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도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법리적인 부분을 다시 한번 더 심리해보라는 취지"이지 "유죄, 무죄를 규정한 판결로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한편, 대법관 출신의 국내 법학전문대학원 A 석좌교수는 이번 판결에 대한 의견이 아님을 전제로 "법리해석의 경우 그 기준에 맞춰 새로 재판하라는 취지로 대법원이 강한 결론을 내기도 하나, 사실인정, 증거의 신빙성에 관한 문제는 파기환송심에서 새 증거가 제시되는 등 여러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어 대개 유죄나 무죄로 못을 박아 판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A 교수는 "1·2심에서 나타나지 않은 증거가 (파기환송심에서) 새로 제시될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형사재판은 고도의 확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확한 증거를 요구한다"며 "대법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팩트체크팀은 팩트체크 소재에 대한 독자들의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이메일()로 제안해 주시면 됩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