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한중연 연구원, 학술지 '민족문화'에 논문 발표
"신료 문집 관련 시 많이 써…당파에 위로 마음 전하기도"
"충신에 관한 글 읽은 숙종, 詩로 신하에게 충절 요구"
"세상일 어긋나 철통같은 요새 잃자/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네/ 누상에서 분신해 문루와 함께 사라졌으니/ 천자는 알리라! 늠름한 그 충절을"
조선 숙종(재위 1674∼1720)은 17세기에 활동한 문인 조석윤의 글을 모은 '낙정집'(樂靜集)에서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 심현, 이시직, 송시영에 관한 시를 읽고는 이같이 읊었다.

충신의 절개를 어제시(御製詩, 임금이 지은 시)로 남긴 것이다.

숙종은 비단 병자호란 때 순국한 사람뿐만 아니라 단종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과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인 정몽주 등 지금도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을 다룬 시를 많이 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9일 학계에 따르면 김덕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국고전번역원이 펴내는 학술지 '민족문화' 최신호에 실은 논문에서 "숙종의 독후시(讀後詩) 이면에는 자신의 신하들도 국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독후시는 독후감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지은 시를 뜻한다.

김 연구원은 숙종이 한시 800여 수와 산문 300여 편을 썼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숙종 한시 중에는 우리나라 신료 문집을 읽은 흔적이 종종 나타나는데, 이는 여타 국왕의 작시(作詩) 경향과 비교해 또렷한 차이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선 국왕 가운데 자국 신료의 저술을 열람한 뒤 그 감회를 한시 속에 지속해서 피력한 사례는 숙종이 유일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숙종이 집중적으로 독후시를 지은 시기가 1696∼1715년이라고 설명했다.

숙종은 1694년 갑술환국을 통해 남인을 몰아내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하도록 했다.

그래서인지 노론과 소론 인사의 문집을 보고 쓴 독후시가 많지만, 남인 인사와 관련된 시도 남겼다고 김 연구원은 분석했다.

숙종 독후시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충성심이 두터운 신하로는 정몽주, 이존오, 길재, 사육신, 조광조 등이 있다.

예컨대 숙종은 정경세 문집인 '우복집'(愚伏集)을 읽다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 남의 시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한 작품을 보고는 "문충공이 어찌 천명을 몰랐겠는가/ 의열로 목숨 버리는 걸 배웠을 뿐/ 천백 대에 훌륭한 교화 수립했으니/ 영혼 또한 송경(松京, 개경)을 그리워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김 연구원은 숙종이 이 시를 통해 정몽주를 충절의 전범으로 내세웠다고 보고 "국왕이 특정 신료에 대해 글을 지으면 책과 시문, 현판 등을 통해 확산하므로 숙종의 독후시 제작은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를 민간에 퍼뜨리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충신에 관한 글 읽은 숙종, 詩로 신하에게 충절 요구"
독후시로 충절을 권장한 숙종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판단을 신료에게 전하거나 특정 당파를 위로할 때 시를 활용하기도 했다.

김 연구원은 숙종이 정권 교체라고 할 수 있는 환국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정치력을 키웠고, 권력에서 소외된 신하들을 독후시로 위무했다고 말했다.

그는 "숙종이 김수항·김만기·이경여 등 노론 인물을 높이 드러낸 데에는 노론 세력을 위무해 정국의 안정적 운영을 도모하고, 환국 정치의 앙금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며 "남인, 소론, 종친 세력에게도 한시를 통한 정치적 위무와 포섭을 했다"고 논했다.

이어 "숙종은 특정 사안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한시로 자신의 속내와 의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