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등 특정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에 물질의 이름이 들어가는 걸 보면 물질과 인류의 문명사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연자원이나 농산물만으로 인류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더 편리한 삶을 위해 물질을 가공하고 응용하는 기술이 있어 생존을 넘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고대 인류를 움직였던 이런 동기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기나긴 역사에서 물질은 어떻게 문명을 형성해왔을까? 1967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코넬대 재료공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스티븐 L. 사스 박사는 돌, 점토, 구리, 청동과 같이 고대에 발견한 물질부터 시멘트, 실리콘, 폴리머 등 현대에 발견한 물질까지 문명과 물질이 진화해온 방식을 두루 살폈다.
'문명과 물질'은 2019년 타계한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펴낸 연구서다.
역사와 과학이 쌍두마차처럼 내달려온 물질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물질이 인류의 문명을 어떻게 형성해왔나'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공한다.
예컨대 철의 발견은 가마 온도를 높이는 기술을 개발케 했고, 가마 온도가 높아지자 유리를 다루는 기술도 함께 개발됐다.
희귀품이던 유리는 일상용품이 돼 사람의 생활 공간에 창문을 선사했다.
고대 그리스는 아테네의 은광 덕분에 페르시아가 에게해로 진출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의 알렉산더 대왕은 트리키아에서 추출한 금으로 전대미문의 제국을 건설했다.
중국이 이역만리 먼 길로 무역과 탐험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종이와 나침반, 화약 등의 새로운 물질 덕분이었다.
16세기 남아메리카는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차지하려던 스페인의 정복 활동에 최적지였다.
근대의 영국은 부족한 물질을 산업혁명으로 극복하며 강대국 대열의 선두로 나섰고, 현대의 미국은 물질 혁신의 중심지이자 실리콘, 광섬유 기반의 컴퓨터와 정보혁명의 본거지로 거듭나며 세계 최강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책은 인류가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아 쓴 물질부터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만든 합성물질까지 하나하나 설명해나간다.
돌은 무기로, 점토는 곡식과 액체를 담는 용기로 사용됐고, 저장·분할·용해가 가능한 금과 은은 새로운 형태로 만들기 쉬워 주요 통화 수단이 됐다.
철과 구리는 탄소와 결합시키는 제련법의 발달로 더욱 견고해졌으며, 유리는 귀중품에서 일상용품으로 대중화했고, 초석과 황 등의 혼합물인 화약은 무기로 쓰이며 전쟁 승패를 좌우하는 주요 물품이 됐다.
이와 함께 알루미늄, 폴리머, 니켈 합금, 실리콘 등 새로운 합성 물질들은 신소재로서 현대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꿔놨다.
이 같은 혁신적 물질의 발명은 인류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게 하는 '자본' 시스템을 가져왔다.
각 물질의 속성과 특성을 이해할수록 인류가 문명에 사용하는 재료 또한 늘어난 것. 강철의 출현은 1800년대에 고층건물의 시대를 열었고, 자동차 제조업 등 각종 산업이 새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누구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려면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가장 동떨어져 있고 가장 이질적인 것들의 힘을 하나로 결합시켜야' 하며 문명은 항상 그런 능력에 의지해왔다.
이런 도전에서 해결 방법을 찾고 상용화하면 미래 세대가 경험할 역사의 향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물질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역사는 인류가 발명 혹은 발견해 사용·변용·남용한 모든 물질을 합성하듯이 버무려낸 것이며, 각 물질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