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동행] 길에서 굶어 죽는 이 없길…12년째 밥 나누는 정영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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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서 화∼토요일 봉사…코로나19로 지난해부터 도시락 제작
36살까지 방탕한 생활…죽음 문턱서 깨닫고 나눔 실천
"적어도 길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밥 나눔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 지난달 29일 목요일, 경기 의정부시 내 한 교회에서 정영일(58) 목사를 만났다.
골목길 허름한 건물 1층에 자리한 작은 교회가 그의 안식처다.
벽에 걸린 십자가가 예배당인 것을 알게 해 줄 정도로 구색을 갖추지는 못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구수한 밥 냄새가 가득했다.
예배당 한쪽에 마련된 부엌에서는 냄비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배당 가운데 펼쳐 놓은 테이블에서는 도시락 만들 준비가 한창이었다.
화∼토요일 중 목요일이 가장 바쁜 날이란다.
다른 요일에는 도시락 27개를 만들지만, 이날은 30개를 더 만들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노숙자와 동네 노인들에게 나눠주지만, 목요일에는 방문요양보호사를 통해 추가로 배달하고 있다.
정 목사는 2010년부터 12년째 밥 나눔 봉사단체인 '우리밥집'을 이끌고 있다.
교회 설립과 동시에 이 단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국수로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점심시간 교회로 찾아오는 노숙자나 홀몸노인 등에게 나눠줬다
1년가량 지나자 독지가들이 쌀을 후원했고, 교회 앞에 '사랑의 쌀통'을 설치해 퍼가도록 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부작용이 생겼다.
노숙자들이 쌀을 가져가 술과 바꾼다고 동네 주민들이 귀띔해 줬다.
정 목사는 2011년부터 교회에서 직접 밥을 해 나눠주고 있다.
화∼토요일 점심시간에 이곳에 가면 누구나 넉넉한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도시락으로 바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 장기화하면서 교회 안에서 밥을 먹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 목사는 고등학생 때부터 각별했던 친구가 세상을 등진 뒤 밥 봉사를 결심했다.
이 친구는 알코올 중독이었는데 노숙자로 지내며 밥도 제대로 못 먹다가 어느 날 길에서 동사했다고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적어도 주변에서 굶어 죽거나 길에서 얼어 죽는 것은 막아보기로 해 밥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정 목사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99년 36살까지는 그랬다.
당시 의정부시 내 명문고에 진학했으나 아버지가 쓰러진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갈 생각을 아예 접어야 했다.
폭력 서클 친구들과 어울렸고 등록금을 핑계로 학교도 가지 않았다.
등록금을 보태 준 친구들과 선생님의 독촉에 겨우 학교에 다녔지만, 졸업 후 건달 인생을 살았다.
돈을 벌어 사업을 시작했지만, 알코올·도박 중독으로 곧 문을 닫았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35살 되던 해, 부산 태종대 절벽에 섰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 막살았지만, 이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생전 처음 느꼈다고 했다.
마침 근처에 한 무리의 고등학생이 있었고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뭔가에 끌리듯 다가갔다.
"나도 고등학생 때 너희와 같았는데 결국 이 절벽에 섰다"며 살아온 얘기를 들려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자 후회했다.
정 목사는 2000년 4월 인천의 한 기도원에 들어갔다.
목사가 될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를 알고 싶어 같은 해 8월 신학대에 입학했고 전도사, 부목사 등을 거쳐 목사가 됐다.
2006년 9월 인천에서 개척 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 동네 노인들이 주운 파지를 교회 차로 고물상까지 날라주는 등 목회 활동 못지않게 봉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생계가 곤란해졌다.
그는 2010년 의정부에 와 개척 교회를 세웠다.
친구들과 주민들이 도움을 줬다.
십시일반으로 국수 봉사를 시작했고 현재는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우리밥집은 경기도에 등록된 비영리 민간단체다.
쌀 등을 후원받아 우리밥집을 꾸리고 있지만 늘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올해는 경기도 사업인 '공유부엌'에 선정, 보조금을 받아 도시락 만드는 데 보태고 있다.
정 목사는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며 "베풂과 나눔은 배고픔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행위"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36살까지 방탕한 생활…죽음 문턱서 깨닫고 나눔 실천
"적어도 길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밥 나눔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 지난달 29일 목요일, 경기 의정부시 내 한 교회에서 정영일(58) 목사를 만났다.
골목길 허름한 건물 1층에 자리한 작은 교회가 그의 안식처다.
벽에 걸린 십자가가 예배당인 것을 알게 해 줄 정도로 구색을 갖추지는 못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구수한 밥 냄새가 가득했다.
예배당 한쪽에 마련된 부엌에서는 냄비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배당 가운데 펼쳐 놓은 테이블에서는 도시락 만들 준비가 한창이었다.
화∼토요일 중 목요일이 가장 바쁜 날이란다.
다른 요일에는 도시락 27개를 만들지만, 이날은 30개를 더 만들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노숙자와 동네 노인들에게 나눠주지만, 목요일에는 방문요양보호사를 통해 추가로 배달하고 있다.
정 목사는 2010년부터 12년째 밥 나눔 봉사단체인 '우리밥집'을 이끌고 있다.
교회 설립과 동시에 이 단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국수로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점심시간 교회로 찾아오는 노숙자나 홀몸노인 등에게 나눠줬다
1년가량 지나자 독지가들이 쌀을 후원했고, 교회 앞에 '사랑의 쌀통'을 설치해 퍼가도록 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부작용이 생겼다.
노숙자들이 쌀을 가져가 술과 바꾼다고 동네 주민들이 귀띔해 줬다.
정 목사는 2011년부터 교회에서 직접 밥을 해 나눠주고 있다.
화∼토요일 점심시간에 이곳에 가면 누구나 넉넉한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도시락으로 바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 장기화하면서 교회 안에서 밥을 먹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 목사는 고등학생 때부터 각별했던 친구가 세상을 등진 뒤 밥 봉사를 결심했다.
이 친구는 알코올 중독이었는데 노숙자로 지내며 밥도 제대로 못 먹다가 어느 날 길에서 동사했다고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적어도 주변에서 굶어 죽거나 길에서 얼어 죽는 것은 막아보기로 해 밥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정 목사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99년 36살까지는 그랬다.
당시 의정부시 내 명문고에 진학했으나 아버지가 쓰러진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갈 생각을 아예 접어야 했다.
폭력 서클 친구들과 어울렸고 등록금을 핑계로 학교도 가지 않았다.
등록금을 보태 준 친구들과 선생님의 독촉에 겨우 학교에 다녔지만, 졸업 후 건달 인생을 살았다.
돈을 벌어 사업을 시작했지만, 알코올·도박 중독으로 곧 문을 닫았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35살 되던 해, 부산 태종대 절벽에 섰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 막살았지만, 이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생전 처음 느꼈다고 했다.
마침 근처에 한 무리의 고등학생이 있었고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뭔가에 끌리듯 다가갔다.
"나도 고등학생 때 너희와 같았는데 결국 이 절벽에 섰다"며 살아온 얘기를 들려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자 후회했다.
정 목사는 2000년 4월 인천의 한 기도원에 들어갔다.
목사가 될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를 알고 싶어 같은 해 8월 신학대에 입학했고 전도사, 부목사 등을 거쳐 목사가 됐다.
2006년 9월 인천에서 개척 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 동네 노인들이 주운 파지를 교회 차로 고물상까지 날라주는 등 목회 활동 못지않게 봉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생계가 곤란해졌다.
그는 2010년 의정부에 와 개척 교회를 세웠다.
친구들과 주민들이 도움을 줬다.
십시일반으로 국수 봉사를 시작했고 현재는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우리밥집은 경기도에 등록된 비영리 민간단체다.
쌀 등을 후원받아 우리밥집을 꾸리고 있지만 늘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올해는 경기도 사업인 '공유부엌'에 선정, 보조금을 받아 도시락 만드는 데 보태고 있다.
정 목사는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며 "베풂과 나눔은 배고픔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행위"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