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칼럼] "힘들어서 떠나요!"
  지인 이야기다. 그는 오래전 강원도 정선의 한 탄광촌에 살았다. 그 곳에서 광부로 일하며 1남 1녀를 키웠다. 아들이 자라 초등학교 다닐 때 일이다. 아들이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을 보이며 자랑했다.

“아빠!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그래, 잘 그렸구나. 그런데 이건 뭐니?”

“물이 흐르는 강이에요.”

“물이 왜 검정색이지?”

“우리 동네 물이 전부 검정색이잖아요!”

  탄광촌에 사는 아들이 매일 보는 물은 검정색이었다. 그래서 그림에도 물을 검정색으로 칠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탄광촌을 떠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식을 생각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를 했다!”고 한다.

“딸이 이민을 가겠다고 하네요!”

“그래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자기 자식을 위해서 가겠다는데 할 말이 없죠.”

“네. 저라도 뭐라고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며칠 전 일이다. 잠깐 나눈 대화였지만 딸의 이민 계획을 들은 60대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필자가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닌데 속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이민’이라는 말만 듣고도 마음이 많이 허전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딸이 이민을 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속으로 ‘설마!’하며 물었는데 ‘역시나’ 같은 이유였다.

“미세먼지 때문에 숨 쉬기 힘들어서 떠난다고 해요!”

 요즘 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 해외로 이민 가는 사람은 대개 두 부류다. 하나는 가족 전체가 떠나는 이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녀들 유학에 한 부모가 함께 가는 경우다. 주변에도 올해 초 두 가정이 이민을 떠났다. 그런데 이민을 가는 이유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과거에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유학을 갔다면 현재는 “제대로 숨 쉬고 살고 싶다!”라고 명쾌하게 말한다.

 봄이 되니 여기저기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나고 꽃이 핀다. 필자 집 정원에서 가장 빨리 피는 꽃은 ‘복수초’다. 그래서 이맘 때 매일매일 복수초가 나오는 자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아직 싹이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물을 더 듬뿍 주기도 한다. 마치 사랑표현 같다. ‘첫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어느 날 매 년 복수초가 나오는 자리에 작은 싹이 돋아났다. 그런데 희한하게 너무 가늘고 약한 어린 싹 하나만 나온 것이다. 필자가 아는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하였을 때 복수초의 기둥격인 ‘몸통’은 그런 싹으로는 꽃은커녕 자기 몸도 보존하기 힘들어 보였다. 며칠이 지났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이 생겼다.

 복수초는 봄을 대표하는 꽃으로 <미나리아재비과> 식물이다. 우리나라 각처 숲속에서 잘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어디서든 한 번 뿌리를 내리면 특별한 관리가 필요치 않다. 이렇게 기후와 생육환경이 까다롭지 않아 인공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자라는 식물을 ‘야생화’라고 부른다. 복수초가 대표적인 봄 야생화다.

 그렇다면 복수초가 벌인 기막힌 일이 무엇일까? 놀랍게도 복수초가 자기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10년을 한 자리에서 묵고 피고지고를 반복한 복수초가 50cm이상 자리를 옮긴 것이다. “옮겨 갈 수 있는 것 아닌가!”할 수도 있는데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가장 흔한 번식방법은 ‘몸통’인 꽃대는 그대로 있고 열매 즉 종자가 날아가 다른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마치 복수초도 자기가 살던 곳이 더 이상 힘들어서 떠난 것 같았다.  
[이지수칼럼] "힘들어서 떠나요!"
  몇 해 전 시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시기 전 전문가의 조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죽기 전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주거지를 옮기는 것입니다. 주거지를 옮긴다는 것은 오랫동안 자신이 살던 곳에 대한 기억을 인위적으로 뺏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만큼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치매질환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거지를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결정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일이다.

 봄철은 이사철이다. 이사를 하는 데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위처럼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또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서 이사와 이민을 하던. 결국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지금까지 살던 주거지를 옮기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이 때 자식의 이민과 이사를 그저 바라보는 늙은 부모님이 계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다. 그들은 자식의 이사 특히 ‘이민’에 대해 민감해 한다. 물론, 자식의 이민 결정에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자신으로부터 자식이 멀리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 매우 허전하고 큰 상실감을 겪는 것이다. 그들이 모여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자식이 이민을 가면 내가 죽어도 다시 못 볼 것 같다!”
[이지수칼럼] "힘들어서 떠나요!"
 자식을 위한 <이사>도 좋지만 그 이사가 부모와의 <이산>이 되어서 안 될 성싶다. 우리네 인생에 부모님이 <차선>이 아니라 <최선>의 대상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자식을 위해 이사하는 부모가, 그 자식에게 보여줄 부모의 <최선>이기 때문이다.

Ⓒ20190319이지수(jslee308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