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화의 걷기인문학] 걷기의 재해석 - 가족과 걷기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09 누구와 걸을까 – 가족과 걷기
요즘은 길을 걸으면서 부부 또는 연인이 손을 잡고 걷는 것을 보면 기분이 저절로 흐뭇해진다. 노부부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떨어질까 굳이 두 손을 쥐고 가는 모습에는 오랜 세월을 두 분이 행복하게 지내셨구나 하는 기분 좋음이 생긴다. 젊은 연인이 두 손을 꽉 쥐는 것도 모자라 서로 부둥켜안듯이 딱 붙어 걷는 것을 보면 그래 좋을 때다. 더 행복하게 오래 같이 지낼 거라 하는 축복의 마음이 생긴다. 나도 아내와 자주 걷는다. 그럴 때면 이런 시간을 더 자주 가져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걷기
연애 3년 후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다. 아내에게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우리 사이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폭풍 같던 갈등의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함께 하고있다. 지나간 세월도 좋지만, 앞으로 올 세월도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우리는 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한다. 아내와 같이 걸을 때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어서 좋다. 이런 아내와 걷기는 많은 사람이 즐기는 생활이기도 하다.
길을 걷거나 산을 오르다 보면 힘이 들고 얼마나 더 가야 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럼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묻는다. 그럼 돌아오는 대답은 ‘금방이에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마찬가지로 삶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누구나 하는 부부생활, 인생이 그렇게 평탄하게 쉽게 말처럼 지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금방이에요’라는 말은 사실이기보다는 힘들지만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가라는 의미인 것을 한참 뒤에나 알았듯이, 우리의 생활도 쉽게 금방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은 맞았다. 틀릴 수가 없는 길이었다. 세월이 이끄는 나이 듦이다. 하지만 곧은길로 곧장 온 것은 아니다. 곧은길도 구부러진 길도,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걸어야 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 시작한 길은 평탄하고 넓은 길처럼 보였지만 숲으로 들어갔고 숲속에는 아주 짙은 늪이 있었다. 길은 신작로, 소작로, 큰길, 작은 길, 오솔길들이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했다. 크게 넓게 뻗은 길만 계속해서 걸었다면 좋았겠지만, 지루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의 풍경이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했듯이 삶은 늘 변화가 있었다. 늘 새로운 풍경이 있어 익숙해지지 않듯이 삶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세상의 길은 많고 많다. 나는 아직도 삼남대로, 영남대로를 다 마치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 시작하지도 못한 길이 많다. 같은 길을 걸어도 계절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늘 같은 마음으로 걸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서로 같은 감정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길이 단순히 흙이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길 주변의 풍광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이루어내는 의미이다. 같이 사는 것도 그런 의미인 듯하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같이 걷기를 좋아한다. 아마 세상의 부부는 둘의 삶을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을 같이하는 동행자라고 볼 수 있겠다. 아내와 걷기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편안함이다. 길도 같이 걷지만 삶도 같이하는 동반자로서 가질 수 있는 동행 의식이 있어서 그런가?
어느 정도 같이 살아오고야 같이 걷는 즐거움을 알기 시작한 우리와는 달리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같이 걷기를 좋아하는 부부도 있다. 김종휘가 쓴 ‘아내와 걸었다’에서 보면 그의 부부는 동해안, 남해안 그리고 서해안을 걸었다. 그들은 이 여행을 ‘바바 여행’이라 불렀다. 줄곧 바닷길을 따라가면서 바다를 바라보니 바바, 육지의 바깥에서 바깥으로만 걸으니 바바, 발바닥의 한 바닥부터 다른 바닥까지 옮겨야 한 걸음이니 바바…… 바바 여행은 모두 65일이 걸렸다. 이들 부부는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함께 걸으면서 오히려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가족과 걷기
아이들이 크고 나서는 같이 걷는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다. 부모님과 같이 걷기는 더욱 쉽지 않다. 요즘같이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자제될 때는 더욱 그렇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어머니와 장모님을 모시고 가끔 여행을 간다. 그럼 두 분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보면 다행이다 싶다. 필자의 어머니는 원래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좀 뚱뚱한 편이어서 많이 걷지를 못하지만, 장모님은 날씬한 데다 운동을 좋아해서 제법 걸으신다. 그래서 같이 다니면 장모님이 이끄시는 편이다.
요즘 재미는 막내아들과 걷는 시간이다. 3남매 중 터울이 진 늦둥이라 철이 없기는 한데, 다른 운동은 잘 못 하면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녀석이 가자고 하면 열일 젖히고 일어난다. 다행히도 녀석의 취향은 나하고 비슷하다. 걷기의 목적지를 책방으로 하기를 좋아한다. 걸으면서 한국의 정치, 세계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제법 이야기가 통한다. 엄마한테는 딸이고, 아버지한테는 아들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둘 다 아들하고 걷는 재미가 좋다. 아내와 막내 녀석이 팔짱끼고 둘이 꼭 붙어서 걷는 모습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한 후에는 처음으로 강원도 강릉의 궤방산을 함께 걷기도 하였다. 30살 언저리의 딸들은 막내처럼 걷기를 즐겨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자주 이곳저곳 가까운 곳이라도 가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걷는 것, 함께 하기는 진정한 사는 재미를 준다.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가장 실감할 때가 바로 아내 그리고 가족과 함께 걸을 때이다. 현대는 가족의 위기를 많이 이야기한다. 사회적 성공은 걱정을 동반하는 성공이기 일쑤이다. 예를 들면 사업을 하면서 커다란 수주를 받았다면 기분이 아주 좋다. 직장에서 승진을 해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그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못한다. 수주를 받았으면 클레임 받지 않고 잘 마무리할 방도를 바로 고민해야 하고, 승진을 했으며 아랫것 윗것들을 잘 챙겨서 성과를 낼 방도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가족 내에서의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 성적을 잘 받아오면 잘 받아온 것을 기뻐하지 다음에 나빠질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아내가 해준 아침밥이 맛있으면 맛있는 대로 기뻐한다. 가족에서 벌어진 일은 그냥 기뻐하면 된다. 그다음에 그 기쁨을 얼마나 유지할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인간에게 불행을 물려준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행복을 물려준다’는 말 또한 맞는다. 불행과 행복을 물려주지 않기 보다는 둘 다 물려주면서 ‘이타심’을 물려주는 것은 어떨까?
1846년 겨울, 미국의 시에라 네바다 지역의 산맥을 넘어가다가 돈너 계곡에 81명이 월동 장비도 없이 갇혔다. 혹독한 겨울을 산속에서 지내고 살아남은 사람은 젊고 팔팔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서로의 삶을 더 복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삶을 행복하게 한다. 현대에서는 가족의 해체, 가족의 위기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확실히 가족은 권리는 요구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 이기주의의 만연으로 인하여 해체되고 있다. 가족의 해체는 자유의 소극적 형태, 즉 가족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으나, 적극적 형태의 자유, 즉, 가족으로의 자유는 어떻게 획득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가족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지만, 미래에 다가올 가족의 절박한 필요성에 대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 가족에게 가고 싶을 때 자유롭게 갈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그 자유를 위하여 노력해야 할 때이다. 그 시작으로 가족과의 걷기를 권한다. 삶의 소소하고 지속적 행복을 실감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홍재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아내와 걷기
연애 3년 후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다. 아내에게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우리 사이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폭풍 같던 갈등의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함께 하고있다. 지나간 세월도 좋지만, 앞으로 올 세월도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우리는 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한다. 아내와 같이 걸을 때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어서 좋다. 이런 아내와 걷기는 많은 사람이 즐기는 생활이기도 하다.
길을 걷거나 산을 오르다 보면 힘이 들고 얼마나 더 가야 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럼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묻는다. 그럼 돌아오는 대답은 ‘금방이에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마찬가지로 삶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누구나 하는 부부생활, 인생이 그렇게 평탄하게 쉽게 말처럼 지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금방이에요’라는 말은 사실이기보다는 힘들지만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가라는 의미인 것을 한참 뒤에나 알았듯이, 우리의 생활도 쉽게 금방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은 맞았다. 틀릴 수가 없는 길이었다. 세월이 이끄는 나이 듦이다. 하지만 곧은길로 곧장 온 것은 아니다. 곧은길도 구부러진 길도,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걸어야 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 시작한 길은 평탄하고 넓은 길처럼 보였지만 숲으로 들어갔고 숲속에는 아주 짙은 늪이 있었다. 길은 신작로, 소작로, 큰길, 작은 길, 오솔길들이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했다. 크게 넓게 뻗은 길만 계속해서 걸었다면 좋았겠지만, 지루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의 풍경이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했듯이 삶은 늘 변화가 있었다. 늘 새로운 풍경이 있어 익숙해지지 않듯이 삶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세상의 길은 많고 많다. 나는 아직도 삼남대로, 영남대로를 다 마치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 시작하지도 못한 길이 많다. 같은 길을 걸어도 계절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늘 같은 마음으로 걸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서로 같은 감정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길이 단순히 흙이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길 주변의 풍광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이루어내는 의미이다. 같이 사는 것도 그런 의미인 듯하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같이 걷기를 좋아한다. 아마 세상의 부부는 둘의 삶을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을 같이하는 동행자라고 볼 수 있겠다. 아내와 걷기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편안함이다. 길도 같이 걷지만 삶도 같이하는 동반자로서 가질 수 있는 동행 의식이 있어서 그런가?
어느 정도 같이 살아오고야 같이 걷는 즐거움을 알기 시작한 우리와는 달리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같이 걷기를 좋아하는 부부도 있다. 김종휘가 쓴 ‘아내와 걸었다’에서 보면 그의 부부는 동해안, 남해안 그리고 서해안을 걸었다. 그들은 이 여행을 ‘바바 여행’이라 불렀다. 줄곧 바닷길을 따라가면서 바다를 바라보니 바바, 육지의 바깥에서 바깥으로만 걸으니 바바, 발바닥의 한 바닥부터 다른 바닥까지 옮겨야 한 걸음이니 바바…… 바바 여행은 모두 65일이 걸렸다. 이들 부부는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함께 걸으면서 오히려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가족과 걷기
아이들이 크고 나서는 같이 걷는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다. 부모님과 같이 걷기는 더욱 쉽지 않다. 요즘같이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자제될 때는 더욱 그렇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어머니와 장모님을 모시고 가끔 여행을 간다. 그럼 두 분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보면 다행이다 싶다. 필자의 어머니는 원래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좀 뚱뚱한 편이어서 많이 걷지를 못하지만, 장모님은 날씬한 데다 운동을 좋아해서 제법 걸으신다. 그래서 같이 다니면 장모님이 이끄시는 편이다.
요즘 재미는 막내아들과 걷는 시간이다. 3남매 중 터울이 진 늦둥이라 철이 없기는 한데, 다른 운동은 잘 못 하면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녀석이 가자고 하면 열일 젖히고 일어난다. 다행히도 녀석의 취향은 나하고 비슷하다. 걷기의 목적지를 책방으로 하기를 좋아한다. 걸으면서 한국의 정치, 세계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제법 이야기가 통한다. 엄마한테는 딸이고, 아버지한테는 아들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둘 다 아들하고 걷는 재미가 좋다. 아내와 막내 녀석이 팔짱끼고 둘이 꼭 붙어서 걷는 모습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한 후에는 처음으로 강원도 강릉의 궤방산을 함께 걷기도 하였다. 30살 언저리의 딸들은 막내처럼 걷기를 즐겨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자주 이곳저곳 가까운 곳이라도 가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걷는 것, 함께 하기는 진정한 사는 재미를 준다.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가장 실감할 때가 바로 아내 그리고 가족과 함께 걸을 때이다. 현대는 가족의 위기를 많이 이야기한다. 사회적 성공은 걱정을 동반하는 성공이기 일쑤이다. 예를 들면 사업을 하면서 커다란 수주를 받았다면 기분이 아주 좋다. 직장에서 승진을 해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그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못한다. 수주를 받았으면 클레임 받지 않고 잘 마무리할 방도를 바로 고민해야 하고, 승진을 했으며 아랫것 윗것들을 잘 챙겨서 성과를 낼 방도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가족 내에서의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 성적을 잘 받아오면 잘 받아온 것을 기뻐하지 다음에 나빠질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아내가 해준 아침밥이 맛있으면 맛있는 대로 기뻐한다. 가족에서 벌어진 일은 그냥 기뻐하면 된다. 그다음에 그 기쁨을 얼마나 유지할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인간에게 불행을 물려준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행복을 물려준다’는 말 또한 맞는다. 불행과 행복을 물려주지 않기 보다는 둘 다 물려주면서 ‘이타심’을 물려주는 것은 어떨까?
1846년 겨울, 미국의 시에라 네바다 지역의 산맥을 넘어가다가 돈너 계곡에 81명이 월동 장비도 없이 갇혔다. 혹독한 겨울을 산속에서 지내고 살아남은 사람은 젊고 팔팔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서로의 삶을 더 복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삶을 행복하게 한다. 현대에서는 가족의 해체, 가족의 위기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확실히 가족은 권리는 요구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 이기주의의 만연으로 인하여 해체되고 있다. 가족의 해체는 자유의 소극적 형태, 즉 가족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으나, 적극적 형태의 자유, 즉, 가족으로의 자유는 어떻게 획득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가족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지만, 미래에 다가올 가족의 절박한 필요성에 대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 가족에게 가고 싶을 때 자유롭게 갈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그 자유를 위하여 노력해야 할 때이다. 그 시작으로 가족과의 걷기를 권한다. 삶의 소소하고 지속적 행복을 실감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홍재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