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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멀리서 빈다,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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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멀리서 빈다, 나태주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태헌의 한역]


    遠處祈求(원처기구)



    吾人未知處(오인미지처)


    君留如花笑(군류여화소)


    世間有一君(세간유일군)


    重新朝輝耀(중신조휘요)



    吾君未知處(오군미지처)


    吾留如草息(오류여초식)


    世間有一吾(세간유일오)


    重新夕寥寂(중신석료적)



    如今秋氣動(여금추기동)


    千萬君莫痛(천만군막통)



    [주석]


    * 遠處(원처) : 먼 곳, 멀리서. / 祈求(기구) : 기도(祈禱), 기도하다, 빌다.



    吾人(오인) : 나[吾]. / 未知處(미지처) : (아직) 알지 못하는 곳.


    君留(군류) : 그대가 머물다, 그대가 있다. / 如花笑(여화소) : 꽃처럼 웃다.


    世間(세간) : 세상(世上). / 有(유) : 있다. / 一君(일군) : 한 사람 그대. 한문에서는 보통 ‘一君’이라고 하면 한 명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역자는 이 시에서 ‘한 명의 그대’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重新(중신) : 다시 한 번. / 朝輝耀(조휘요) : 아침이 눈부시다.



    吾君(오군) : 당신, 그대.


    吾留(오류) : 내가 머물다, 내가 있다. / 如草息(여초식) : 풀처럼 숨을 쉬다.


    一吾(일오) : ‘一君’과 비슷하게 ‘한 사람 나’, ‘한 명의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이다.


    夕寥寂(석료적) : 저녁이 고요하다.



    如今(여금) : 지금, 이제. / 秋氣動(추기동) : 가을 기운이 움직이다.


    千萬(천만) : 부디, 아무쪼록. / 君莫痛(군막통) : 그대는 아프지 말라, 그대는 아파하지 말라.



    [직역]


    멀리서 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대 머물며 꽃처럼 웃나니


    세상에 한 사람 그대가 있어


    다시 한 번 아침이 눈부시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내 머물며 풀처럼 숨 쉬나니


    세상에 한 사람 내가 있어


    다시 한 번 저녁이 고요하다



    이제 가을 기운 움직인다


    부디 그대 아프지 마라



    [한역 노트]


    시인은, 꽃처럼 웃는 ‘너’가 있어 세상에 눈부신 아침이 오고, 풀처럼 숨쉬는 ‘나’가 있어 세상에 고요한 저녁이 온다고 하였다. 역자는, 꽃은 대개 아름답기 때문에 그 웃음이 눈부신 아침의 속성을 닮고, 풀은 대개 수수하기 때문에 그 호흡이 고요한 저녁의 속성을 닮은 것으로 이해한다. 역자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너’와 ‘나’가 있어 아침이 오고 또 저녁이 오는 것이지만, ‘너’와 ‘나’는 아침과 저녁처럼 만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너’에게 아프지 말라고 먼 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은 무단히 사람을 아프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일찍이 ‘구슬프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가을’이라는 뜻의 ‘비추(悲秋)’라는 말을 곧잘 사용하였다. 가을이면 까닭 없이도 아플진대, 까닭이 있다면 어찌 아프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원시(原詩)의 마지막 행이 역자에게 역설(逆說)로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계절이라 하여도 아플 때는 아파해야지 않을까? 갈대가 바람을 만나면 가을 소리를 내듯이 말이다.


    3연 9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를 한역하면서 역자는 원시의 내용을 약간 누락시키고 어순(語順) 등을 조정하여 10구로 된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으며, 원시의 마지막 1행을 2구로 늘이는 과정에서는 원시에 없는 내용을 부득이 추가하기도 하였다. 한역시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은 각 4구씩, 세 번째 단락은 2구로 구성되었다. 앞 두 단락은 짝수 구 끝에 압운하고, 마지막 단락은 매구에 압운하였으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笑(소)’와 ‘요(曜)’, ‘息(식)’과 ‘적(寂)’, ‘動(동)’과 ‘통(痛)’이 된다.


    2019. 9. 17.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강성위 필진
    자는 백안(伯安), 호는 태헌(太獻)이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연구박사, 서울대학교 중국어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조그마한 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저술 활동을 하며 한시(漢詩) 창작과 번역을 지도하는 한편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출강하여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30여 권의 저서와 역서가 있으며, 창작 한시집으로 ≪술다리[酒橋]≫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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