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기업이 2004년 2분기 순익 8,600만달러를 기록했고 부채도 170억 달러에서 43억 달러고 감소했다. 보유현금은 1억 5,400만 달러에서 30억 달러고 증가되었다. 이를 두고 2006년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제록스가 벼랑 끝에서 돌아왔다” 회생의 가능성을 엿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2012년 매출액은 223억 달러, 자산은 300억 달러를 기록했다. 당신 CNN의 수석 애널리스트인 제프 그린필드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업 회생의 주인공이다!”라고 극찬했다. 제록스는 파산신청 직전의 상황에서 어떻게 짧은 기간 내에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을까?
벼랑 끝에 선 제록스의 첫 번째 선택은 ‘관행’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해낼 인물을 내부 직원인 앤 멀케이를 선임했다. 그녀는 24세에 복사기판매원으로 입사해 16년 간 영업 부분에서 근무했다. 기업경영 경험은 고사하고 MBA 경력도 없는 한마디로 준비되지 않는 CEO였다. 기존의 관행을 버리기 위해서는 머리보다는 발로 뛰는 CEO가 필요했던 거였다. 철저한 CEO 승계프로세스를 고수하던 관행부터 버려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거라 이사회는 판단했다.
파산직전의 기업 CEO가 할 수 있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우리 은행이 이미 기한 연장에 동의했는걸요?”, “그게 아니고요. 우리 회사를 위해서 다른 은행 2곳에 전화를 좀 해주세요.” 멀케이는 알고 있었다. 지금 지켜야 할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9만 명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었지만 기존 직원들을 파견직으로 전환하여 최대한 많은 일자리를 유지하며 직원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믿음과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했다.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세계 각국의 지사를 직접 찾아가 직원과 고객의 의견을 수렴하고 100여명의 관리자를 일일이 만나 헌신적으로 노력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제록스는 1년 반 만에 10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직원들의 노력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9만6000명이던 직원을 5만5000명으로 40%나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항상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았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전 세계 제록스 직원들과 전략을 논의했다. 논의의 실행 예로 증권거래위원회(SEC) 등의 조사를 받을 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때로는 좋지 않은 실적을 감추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회사의 미래를 위해 잘못된 점은 과감히 털고 나갔다. 회계 부정 스캔들에 연루되어 추락된 기업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CEO는 직원을, 직원은 CEO를 믿고 회사가 회생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제록스는 다시 살기 위해 제록스를 버려야 했다. 일본 업체의 저가공세와 최신 기술로 무장한 경쟁사들의 출현은 더욱 환경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외부 환경 속에 제 살을 깎는 노력을 했지만 제록스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록스는 더 이상 ‘복사기이 대명사’가 아니었다. 경영진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은 제록스가 한 때 시장을 독점했다는 사실을 잊어야만 회사가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임직원들은 제록스가 가진 자만, 관습, 기득권을 버리기 위해 밤새워 회의와 토론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어진 폭탄선언, “복사기를 공짜로 설치해드립니다.” “제록스가 복사기를 판매하는 회사인데 복사기 판매를 포기한다고?” 고객과 주변에는 불신과 변화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사실은 복사기를 공짜로 설치해주는 대신 토너, 잉크카트리지 등 소모품과 복사기 유지 및 보수 서비스를 판매하는 전략인 것이다. 결국 복사기 제조에 국한된 기존 비즈니스모델을 버리고 포괄적인 종합 문서 솔루션을 제공하는 서비스회사로 변신하게 되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2012년 매출액은 223억 달러, 자산은 300억 달러로 환골탈태 했다. 만약 제록스에게 위기가 없었다면 조직문화와 비즈니스모델까지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게 제록스는 버림으로써 진화했고, 생존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르는 법이다. 아까워서, 두려워서 버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면 기업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봐왔던 노키아, 코닥, K마트, 소니 등이 기존의 가치만 지키다가 쓸쓸히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망설이는 사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앤 멀케이는 이렇게 강조한다. “때로는 아프더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버림으로써 배웠고, 또 얻었다.” 라고.
인력감축, 조직문화와 비즈니스모델의 변화 속에서도 버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연구개발비를 매출 6%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GE의 잭 웰치가 강조했던 “만약 기업내부의 변화가 외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기업은 망할 것이라 확신한다.”는 주장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우유 한 잔으로 이틀을 버텨야 한다.” 1990년 초 쿠바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소비에트 연방붕괴로 소련의 원조가 전면 중단되었다. 미국의 금수(禁輸)조치까지 강화되었고 농약 98%, 화학비료 94%를 소련에서 원조 받던 쿠바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농사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시민들의 몸무게는 10kg씩 줄였고 간단한 질병조차 치료가 불가능했다. 제록스가 그랬던 것처럼 완전한 붕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농약과 화학비료의 공급 중단은 자연스럽게 유기농법개발로 연결되어 6,000여 종의 지렁이를 연구해 분변토를 생산하고 곤충과 동물의 먹이사살을 연구해 천적으로 해충을 방지할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쿠바는 ‘유기농 강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궁즉통(窮則通), 궁하면 오히려 통하는 데가 있다. 정글에도 지도는 있고 위기에도 돌파구는 존재한다. 위대한 기업은 위기돌파의 힘을 바로 여기에서 찾는다.
글.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ijeong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