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업적 소재에 흑백 영화…자연과 배우가 메워줘"

역사 속 사람, 민초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아온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보다 덜 알려진 형 정약전, 그가 유배지에서 쓴 어류도감 '자산어보' 이야기다.

또 '자산어보' 서문에 집필을 도운 사람으로 언급된 청년 창대와 섬사람들의 이야기다.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세계관을 드러내는 건 사건보다 사연"
이준익 감독은 최근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 "본래 '자산어보'를 찍을 생각은 아니었다"고 했다.

'황산벌'을 시작으로 첫 사극 천만 영화 '왕의 남자'와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 '평양성', '사도', '동주', '박열' 등 필모그래피의 절반을 사극으로 채운 그는 스스로 '역덕'(역사 덕후. 역사에 흥미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작은 동학이었어요.

5년 전쯤 농민혁명에 관심을 두게 됐는데, 왜 동학이라 불렀나 보니 서학이 있잖아요.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정치 기득권 세력은 사학(邪學)이라고 불렀고요.

책을 읽다 보니 인상적인 인물이 등장했는데 정약전의 조카사위 황사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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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은 신유박해 중 충북 제천의 토굴(현재 배론 성지)에서 조선의 박해 상황을 빼곡히 적어 중국의 주교에게 전하려다 발각돼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정약전의 동생 정약종도 순교하고, 배교의 뜻을 밝힌 약전과 약용 형제는 유배를 당한다.

"황사영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려고 보니 드라마가 너무 짧아서 안 됐고, 정약용은 러닝타임 두 시간짜리 영화가 아니라 16부작으로 만들어야 해요.

정약전이 눈에 띄었는데, 성리학의 기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산어보'를 왜 썼는지, 또 '자산어보' 쓰는 걸 도와줬다는 창대라는 인물이 너무 궁금해졌죠."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세계관을 드러내는 건 사건보다 사연"
이 감독은 "창대와 약전이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 속에서 시대의 단면을 치고 들어갈 수 있겠구나, 사건보다는 사연 위주의 사극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고 했다.

감독의 말대로 상업적이지 않은 소재에, 일반적이지 않은 흑백 영화로 만들어 내놓으면서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가볍고 따뜻한 웃음과 간결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고루 담는 건 감독의 장기이고, 사극이라는 장르나 흑백 영화도 전작들의 성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이번에는 남도의 자연이 한몫했다.

남쪽 바다 섬마을의 비경과 태풍이 지나가고 남겨놓은 파도는 흑백 화면 안에서 더욱 빛나고 도드라졌다.

이 감독은 "요즘 사극을 만들려면 100억도 쉽게 드는데, 흑백이라 용이한 점도 있어 그 반도 안 되는 돈으로 만들었다"며 "자연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기를 십분 활용하고, 잘하는 배우들이 메워줬다"고 공을 돌렸다.

흑백의 간명한 대비는 약전과 창대라는 인물의 대비로도 이어진다.

실존 인물이지만 창작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창대가 왜 영화 속의 그런 인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도 간명했다.

"약전의 상대적 개념인 창대가 선명하게 드러나면 약전도 더 선명해져요.

상대 비교를 통해 비교의 가치가 뚜렷해지는 거죠. 창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약전의 판단, 그 관계성의 변화가 세상과 만나는 본질이라고 생각했어요.

창대가 바뀌면서 당대의 구석구석을 설명할 수 있도록 창대를 만든 거죠."
이 감독은 "왜 계속 사극을 만들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면서도, 그 시작은 분명히 말했다.

"외화 수입할 때 해외 마켓에 가면 외국인들이 현대의 한국에 대해서는 삼성이니 현대니, 분단국가 정도라는 건 알았어요.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한국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더라고요.

전성기의 일본 영화는 사극이었고, 중국의 역사야 아시아의 역사고.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한국은 사극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찍은 게 '황산벌'이고, 내친김에 한 번 더 한 게 '왕의 남자'죠. 그러다 이렇게 '자산어보'까지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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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세계관을 드러내는 건 사건보다 사연"
그는 "사극이 영웅이나 전쟁, 정치만 자극적으로 좇다 보니 일상성이 간과됐는데, 사건보다 사소한 일상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세계관을 드러내 줄 수 있다"며 역사 속 사람 이야기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책에 이름 하나 달랑 남아있어도 그의 빛나는 순간을 영화로라도 목격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런 게 사극의 매력 아닌가요.

그저 시간이 지나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영화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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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