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열차
송찬호

지금 여수 오동도는
동백이 만발하는 계절
동백열차를 타고 꽃구경 가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인 삼월의 신부와 함께

오동도 그 푸른
동백섬을 사람들은
여수항의 눈동자라 일컫지요
우리 손을 잡고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리고 그 눈부신 꽃그늘 아래서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
만약 그 사랑이 허튼 맹세라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들이 우리의 달콤한 언약을 모두 잡아먹을 거예요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요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워요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였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송찬호: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1987년 ‘우리시대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등 출간. 김수영문학상, 동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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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수 오동도는 동백꽃 천지다. 멀리서 보면 오동잎을 닮았다고 해서 오동도라고 부르지만, 이름과 달리 섬에는 동백나무가 가득하다. 3000그루가 넘는다.

동백은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기점이자 종점인 이곳을 겨울부터 봄까지 온통 붉게 물들인다. 오동도 동백꽃은 다른 곳보다 작고 촘촘해서 더욱 정이 간다.

송찬호 시인은 동백을 유난히 좋아한다. 『붉은 눈, 동백』이라는 시집을 비롯해 ‘동백’ ‘동백이 활짝’ ‘동백 등을 타고오신 그대’ 같은 시를 줄줄이 썼다. 동백에 몰입해서 몇 해 동안 여수까지 밤차를 타고 달려가기도 했다.

어느 해 봄, 그는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새벽녘 여수역에 내렸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여수항의 눈동자’로 불리는 오동도로 가 동백숲길을 걸었다. 그에게 동백의 붉은빛은 ‘경이로움과 상서로움의 길상과 벽사의 뜻이 있는 듯’ 보였다. 동백이 떨어져 내리는 걸 보면 그 생명의 맺고 끊음이 그렇게 단호해 보일 수 없었다.

‘저 속으로 고요하고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꽃을 어떻게 불러낼 수 있을까, 뚝뚝 모가지째 떨어지는 동백을 어떻게 문자로 받아낼 수 있을까.’

그는 동백에 동물의 역동성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러자 동백이 그에게 설화의 세계로 다가왔다. 그 꽃의 이미지에 여러 개의 동물적 이미지도 겹쳐졌다. 마치 남쪽바다 다도해 어딘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동백국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그가 떠올린 표현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과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고’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울 수 있는 살 만한 땅, ‘남쪽 바다 초승달 같은 항구’였다.

그의 상상력은 ‘사자’에서 ‘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빠, 동백은 어떻게 생겼어요/ 곰 아저씨처럼 무서워요?// 동백은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이란다/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 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 그런 부리부리한 동백이/ 앞발을 번쩍 들고/ 이만큼 높이에서 피어 있단다’(산경(山經) 가는 길 부분)

사자의 표상이 이빨과 갈기라면, 곰의 그것은 발바닥이다. 곰에게 발바닥은 세계를 포착하는 삶의 안테나다. 시인은 “노역의 뚝살이 박힌 두툼한 그의 앞발바닥에서 삶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피어 있는 동백을 보았다”고 말했다. 우리 눈높이에 핀 동백에서 ‘앞발을 번쩍 들고’ 서 있는 곰의 발바닥을 떠올리는 시인의 감성과 눈빛이 동백꽃잎처럼 붉게 빛난다.

그날 그는 여수 시내를 버스로 돌면서 진남관 앞을 지날 때 입속으로 이미자의 ‘동백꽃 피는 항구’를 웅얼거리곤 했다는데, 나도 곧 오동도에 가면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송찬호 시인의 ‘사자’와 ‘곰’ 이미지를 다시금 음미해 봐야겠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