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 속 연정 이탈 주도한 마테오 렌치 전 총리
국민 73% "자신의 정치적 이득만 추구"…국내외 시선 곱지 않아
[특파원 시선] 현대판 마키아벨리와 이탈리아 정치 위기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국가) 3위 경제국인 이탈리아에 새해 벽두부터 정국 위기가 엄습했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간신히 지탱해온 연립정부가 내홍으로 또다시 좌초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M5S), 중도 좌파 성향의 '민주당'(PD)과 함께 연정을 이끌어온 중도 정당 '생동하는 이탈리아'(IV)가 연정 탈퇴를 선언하면서다.

1946년 공화국 수립 이래 지금까지 총리는 29차례, 내각은 66차례 교체됐다는 지표만 봐도 이탈리아에서 정국 위기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치가 경제와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은 공화국 역사 70년 넘게 반복돼온 '클리셰'다.

하지만 지금은 평시와는 다른 상황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겪는 가운데 정국 위기가 닥친 것이다.

작년 2월 서방권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 대량 피해가 현실화한 이탈리아에서는 14일(현지시간) 현재까지 누적 확진자 230만 명, 사망자는 8만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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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 정책에서 실수가 잦아 비판도 많이 받은 정권이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방역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비상시국이다.

현지의 많은 정치전문가와 국민이 "무책임하다"며 IV를 비판하는 배경이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권력 놀음'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정국 위기를 주도한 인물은 IV의 실권자인 마테오 렌치(46) 상원의원이다.

그는 주세페 콘테(57) 현 총리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 등을 연정 이탈의 이유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합리적이라고 믿는 이탈리아 국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 행보는 현 위기의 숨은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2009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피렌체 시장에 당선되며 정계에 발을 들인 렌치는 2013년 집권 민주당 대표로 선출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39세의 역대 최연소 총리에 오르며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중앙 정치 무대의 최정상에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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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에 오르는 과정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당권을 확보한 그는 취임 1년도 안 된 엔리코 레타 총리 교체안을 민주당 중앙위원회에 상정해 136대 14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시켰다.

스스로 총리가 되고자 하는 욕심때문이었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이를 '당내 쿠데타'라고 불렀다.

무리수를 두고 쟁취한 그의 권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시장·기업친화적 개혁에 민주당 지지자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2016년 의욕적으로 추진한 상원의원 수 감축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서 총리직에서 자진 사임하는 운명을 맞았다.

개헌안 내용 자체는 명분이 있는 데다 정치 개혁을 위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으나 렌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부결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는 국민투표에 앞서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총리 사임 몇 달 만에 정계에 복귀해 다시 당권을 잡았고 그의 당 대표직은 2018년 총선 참패에 따른 책임론으로 사임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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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계에서 잊혔던 그가 재차 주목을 받은 것은 2019년 9월 민주당 탈당에 이은 IV 창당이었다.

이는 오성운동-민주당 간 '투톱' 연정이 '스리톱'으로 바뀌는 계기였다.

3당의 정치적 이념과 지향점이 달라 연정 내부 갈등의 양상도 그만큼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도를 띠게 됐다.

그는 당시 탈당의 변을 통해 좌편향적이고 정쟁에 몰두하는 민주당에 실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는 정계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지분을 키우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현지의 여러 정치 평론가들은 권력 쟁취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렌치의 정치 스타일을 빗대어 '권모술수의 화신', '현대판 마키아벨리'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이번 정국 위기도 그 연장선에서 본다.

IV가 창당 이래 줄곧 지지율 3%를 밑도는 상황에서 이렇다 할 돌파구를 잡지 못하자 의도적으로 판을 한번 크게 흔들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한 콘테 총리를 내보낸 뒤 새 연정 구성 협상 과정에서 몸값을 높여보겠다는 포석이 깔렸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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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기관 유트렌드의 로렌초 프렐리아스코 대표는 로이터 통신에 "렌치가 콘테를 제거하려 한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며 "이번 위기의 본질은 정책이 아니라 렌치가 더 큰 정치적 입지가 보장된 새 정부를 만들려 한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도 곱지 않다.

'렌치가 자신의 정치적 이득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73%에 달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있다.

현 사태에 대한 주요 외신의 관전평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렌치의 "정치적 야심"을 부각했고, 프랑스의 레제코(Les Echos)는 "우리 모두 마테오 렌치가 누구인지 잘 안다"고 비꼬았다.

"가장 취약한 시점에 발생한 무책임한 위기"(스페인 일간 '엘 파이스'), "렌치의 숨은 의도는 정권의 정중앙에 자리 잡아 중심추 역할을 하는 것"(폴리티코 유럽판) 등의 분석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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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치는 길지 않은 그의 정치 인생에서 무수히 많은 정치적 책략과 책동을 시도했으나 총리직을 쟁취한 순간 빼고는 대체로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이번 정국 위기도 그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정교하게 기획된 일이라면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한번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의도의 순수성과 관계없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정치적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결과가 국민 또는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갈 경우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이탈리아 정계의 '뉴스메이커'인 극우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가 2019년 8월 정권을 잡고 총리직에 오를 욕심으로 오성운동과의 연정을 파탄 냈다가 민주당과 새 연정을 만든 오성운동의 되치기로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기억이 아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