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서 인정받은 신용으로 차관도입 계약 체결
주변 반대 무릅쓰고 참치 통조림 선보여 '대박'
유학 경험 바탕으로 증권업 진출…AI 인재양성 관심
고령에 현업에서 물러났지만 AI에도 관심을 가지며 인재 양성을 위해 사재까지 출연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동원'(東遠),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김재철 명예회장이 KAIST에 500억원 기부 약정을 한 것은 다음 먹거리로 AI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바다를 누비며 원양업에 투신했다. 이후 제조업, 물류업은 물론 증권업에도 진출하며 다방면으로 동원그룹을 일궈 이번 AI 관련 기부금 출연에도 관심이 모인다.동원그룹의 역사를 담은 '동원그룹 50년사'에 따르면 회사명인 '동원'(東遠)은 '전세계를 무대로 뛰는 동쪽의 나라'라는 뜻을 담았다. 김재철 명예회장 본인이 직접 작명했다. 회사 로고에는 지구의 날줄과 씨줄, '동녘 동(東)'자를 형상화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겠다는 비전을 담았다.
국내외 원양업계에서 베테랑 선장으로 인정받던 김재철 명예회장의 역량을 먼저 알아본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의 여러 기업으로부터 독자적으로 회사를 운영해보라는 권유를 받은 김재철 명예회장은 1969년 4월16일 동원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서울 중구 명동의 작은 사무실에 터전을 마련한 동원의 시작은 직원 3명이 전부였다.
그해 7월1일 동원은 일본 도쇼쿠사의 미국 현지법인 올림피아 트레이딩사로부터 지불보증 없이 37만달러에 달하는 제31동원호와 제33동원호의 현물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은행이나 정부의 지불보증 없이 외국 회사에서 인정받은 신용만으로 차관을 도입한 것은 파격적이라 할 만했다. 동원은 1982년 종합식품회사로 발돋움하며 크게 성장했다. 원어 그대로 해외에 수출해 오던 참치를 '통조림'으로 가공해 국내 시장에 선보인 게 변곡점이었다. 김재철 명예회장은 어떤 어류를 가공할지 오랜 검토 끝에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참치를 가공하기로 결정, 내수시장에 판매했다.
당시 국내에는 참치 통조림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일반 국민들은 참치가 어떤 생선인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그는 소득 수준 향상에 따라 참치 시장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했다.
이후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내수시장은 물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늘어나 참치캔 판매가 급증했다. "동원참치를 먹어보지 않는 국민이 없을 정도"라는 말까지 생겼다.
원양업과 전혀 다른 증권업으로 시선을 돌리다
원양업과 식품업에서 기반을 다진 동원이지만 김재철 명예회장은 전혀 다른 증권업으로의 진출을 선언해 업계를 발칵 뒤집었다. 그가 '3차 산업' 진출 분야로 증권을 선택한 것은 금융산업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판단했기 때문. 미국 하버드대 AMP 과정(최고경영자 코스)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김재철 명예회장은 미국에서 3개월간 공부하며 하버드대에서 MBA를 취득한 우수 학생들이 어디에 취업하는지 살폈다. 그들은 대부분 제조사가 아닌 투자은행이나 증권사를 선택했다. 자본주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인재들이 증권회사로 모이는 것을 목격한 그는 한국에서도 향후 증권업이 유망 산업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당시 마침 국내 증권업계 침체로 한신증권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재철 명예회장은 매물로 나온 한신증권 입찰에 나서 지금의 한국투자증권 발판을 마련했다.
물류·제조업과 증권업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성공 가도를 달린 김재철 명예회장은 창업 50년 만인 지난해 경영 일선에 퇴임했지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AI라는 새로운 분야에 높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AI 시대를 맞이해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잡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AI 인재 양성이 필수라는 신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앞서 지난해에 한양대에 30억원을 기부했다. 국내 최초 AI솔루션센터인 '한양 AI솔루션센터' 설립이 그 결과물이다. 동원은 이미 2017년부터 AI를 활용한 로봇 프로세스 자동화(RPA)를 도입하고 AI 면접을 시행하는 등 발 빠르게 AI 기술을 적용했다.
수십 년 동안 원양어선을 타고 한국인의 밥상에 참치 통조림을 올리면서 '참치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의 기부는 오래 됐다. 월급쟁이 시절부터 고향인 전남 강진 일대 학생들 학비를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1979년 사재 3억원을 출연해 장학재단(동원육영재단)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40년간 8000여명에게 장학사업, 연구비, 교육 발전기금 등으로 약 420억원을 지원했다.
김재철 회장의 다음 목적지는 '인공지능'
김재철 명예회장의 장학사업은 이제 AI 분야로 구체화됐다. 그는 지난 16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500억원 기부 약정을 하면서 "세계 각국이 AI 선진국이 되기 위해 치열한 선두 경쟁을 하고 있다"며 "미국과 중국의 AI 특허 신청 건수는 각각 15만·14만건에 달하지만 우리는 4만 건에 불과한 실정"이라고 했다.그는 "AI 기술 발전을 위한 길을 고민한 끝에 우수한 교수진과 기초역량을 갖춘 KAIST를 떠올렸다"면서 "KAIST가 선두 주자가 돼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을 많이 모셔오고 석·박사 과정 학생 수를 대폭 늘려 한국을 AI의 메카로 발전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김재철 명예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카이스트는 2023년까지 서울 양재로 이전 예정인 AI 대학원 이름을 '김재철 AI 대학원'으로 명명했다. 세계 최고 수준 연구 역량을 갖춘 교수진을 확충해 2030년까지 전임교원 수를 40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개원한 KAIST AI 대학원에는 구글, IBM 왓슨,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 기업 연구소 출신 전임교수 13명 등 21명의 교수진과 석·박사 과정 학생 138명이 재학 중이다.
신성철 KAIST 총장은 "김재철 회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실천이 선진 기부문화를 만드는 데 마중물이 될 것"이라며 "KAIST가 AI 인재 양성의 세계적 허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