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소리 그린 LP '댄싱 위드 워터'…"물 같은 음악"
지난 8월 안테나 레이블의 유튜브 공간 '안테나 랩'에 조금 특별한 음악이 등장했다.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의 신곡 'Moment In Love'.
영롱한 소리가 마치 숨결처럼 깜박깜박 이어지며 13분간 신비로운 음악적 풍경을 펼쳐낸다.

소리의 패턴은 어떤 인위적 질서에도 얽매이지 않은 것 같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제주에 귀농해 살고 있는 루시드폴이 음악으로 통역한, 아기 진귤나무의 소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의 소리를 어떻게 음악으로 그려냈을까.

최근 이메일로 인터뷰한 루시드폴은 "'실험'이 '음악'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나무에 센서를 부착해 전기 신호를 받고 모듈러 신시사이저 등을 통해 음악 소리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쳤다.

여기에 루시드폴이 즉흥 연주로 덧입힌 사운드가 어우러졌다.

그는 "나무는 저에게 '악보'를 그려준 것과 비슷하다"며 "미세한 '생체 전압'으로 그려진 악보를 모듈러 신시사이저가 '미디 악보'로 바꿔주는 통역을 하고, 제가 지정한 음색의 악기로 나무의 악보가 연주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귀를 기울여보니 진귤나무는 비슷한 연주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미세한 자극에도 즉각적이고 크게 반응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커튼을 열면 더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이라든가, 손끝으로 나무를 톡, 건드린다든가" 하는 것들.
그의 설명과 함께 음악을 들으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나무에게도 삶은 숱한 자극에 감응하며 매 순간 미묘하게 변화하는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실시간으로 그런 나무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몹시 경이로웠습니다.

한없이 정적이고 무던하게 보이는 나무도 실은 수많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소리로 확인한 경험이었지요.

'우리는 다르지만,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Moment In Love'는 그가 이달 선보인 앰비언트 연주 앨범 'Dancing With Water'에 수록됐다.

이번 앨범은 한정판 LP로만 발매됐고 음원 사이트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발매한 9집 '너와 나'를 비롯한 루시드폴의 이전 정규 앨범들과는 다른 방식이다.

또 다른 수록곡 'Dancing With Water I' 역시 안테나 뮤지션들의 자유로운 음악 공유 공간인 안테나 랩에서 먼저 선보였다.

그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정규 음반과 그 외의 다른 실험, 시도, 다른 페르소나의 비정규 음반을 구분해서 발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그런 얘기도 할 겸 (유)희열 형을 만났는데, 형이 '안테나 랩'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Dancing With Water I'와, 이어지는 'Dancing with Water II'는 매 순간 다른 무늬를 그리는 물의 심상을 음악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루시드폴은 "물둘레처럼 같은 듯 결코 같지 않은, '반복 없는 반복'이 켜켜이 쌓인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고 전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반복이 그러하듯이.
"작년 말 정규 앨범을 낸 후 올 초부터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달리 재활을 할 방도가 없어서, 집 근처 수영장에 가서 물속을 걸으며 몸을 추슬렀습니다.

봄이었는데, 수영장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거리는 물빛이 참 예뻤습니다.

그런 물빛이나, 제 몸 주위로 번져나가는 물둘레를 보면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었습니다.

"
그의 말처럼 이번 앨범은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순간에 만들어진 곡들"이기도 하다.

그는 "돌이켜보니 지금껏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러왔던 것 같다"며 "오롯이 나를 위한 음반/음악을 만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음악을 재정의하는 것은 지난 정규앨범 '너와 나'에서부터 이어진 시도. '너와 나'는 십년지기 반려견 보현을 음악적 파트너로 작업한 앨범이다.

손가락 부상으로 꽤 오랜 시간 기타를 잡지 못했던 루시드폴은 연주 대신 기계를 통한 소리 창조를 탐구하게 됐고, 이는 보현이 내는 소리를 음악적으로 재창조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음악은 뭘까를 끊임없이 수십 년 동안 생각하면서 살아오긴 했지만 스스로 알게 모르게 좁은 '틀' 속에서 음악을 바라보고 정의하며 살아온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다치고 반년 넘게 기타를 잡을 수 없었던 그 순간의 사고가 어쩌면 저의 오랜 틀에서 저 자신을 해방시켜준 모멘트가 된 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루시드폴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상상력을 확장하다 보면, 네 번째 트랙 'Fledglings'에서 생각이 좀 더 많아진다.

제주도 과수원에서 녹음한 포크레인 소리로 시작하는 곡에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가녀리면서도 끈질기게 섞여든다.

개발의 광풍으로 "휴일도 없이 땅을 파고 돌을 깨고 나무를 베고 집을 지어 올리"는 풍경 속에서도 작은 생명들은 은신처를 찾아 삶을 이어간다.

그는 앨범 라이너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무력한 저는, 이런 굉음들을 녹음해서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치유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