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 의료기기에 맞는 새로운 수가 체계 필요
디지털 헬스케어의 기술 혁신이 낳은 큰 변화 중 하나는 의료기기 범주의 확장이다. 기존 의료기기는 하드웨어였다. 체온계, 혈압계, 엑스레이 촬영기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제 의료기기는 소프트웨어로 확장하고 있다.

흉부 엑스레이 영상을 판독해서 결절을 찾아주는 인공지능, 앱·게임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최근까지 60개 정도 인공지능 의료기기를 인허가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올해 불면증 치료용 앱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용 게임을 허가했다.

최근 FDA 규제 혁신의 중심에도 소프트웨어 의료기기가 있다. 사전 승인 제도 등의 파격적인 규제 방식을 내놓는 것도, 디지털 헬스케어 전담 부서를 신설한 것도 모두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의료기기 정책, 규제 및 수가는 여전히 하드웨어에 맞춰져 있다.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를 허가, 심사 및 규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력과 전문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는 하드웨어와 구분되는 여러 특징이 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쓰면 쓸수록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앱 및 인공지능을 사용하면 그 결과로 새로운 데이터가 창출된다. 이 데이터를 다시 학습하면 성능 개선으로 이어진다. 선순환 고리는 빠르게 반복된다.

이런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의 특성은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의료보험제도와 충돌한다. 기존의 보험체계는 임상연구를 통해 먼저 근거를 만들고, 이에 기반해 보험 적용 여부 및 수가를 결정한 이후 시장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이런 선평가 후진입 방식은 하드웨어 의료기기에 적합하다.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는 시장에 진입해 사용돼야만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선순환 구조가 발동된다. 즉 시장에 진입해야만 제대로 평가가 가능한데 현재 수가 체계는 평가가 좋아야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현재 식약처 허가를 받은 60여 개의 인공지능이 모두 신의료기술평가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것은 이 모순을 반영한다.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의 특성을 반영한 수가 체계 제정이 필요하다. 이미 주요국은 선순환 구조를 발동시키기 위한 ‘마중물 수가’를 직간접적으로 부여하기 시작했다. 가장 적극적인 독일은 최근 디지털 헬스 특별법을 통해 인허가받은 소프트웨어에 무조건 수가를 부여한다. 그렇게 시장에 먼저 진입해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되먹임 고리를 12개월 동안 작동시킨 다음 재평가하는 방식이다. 같은 목적으로 영국은 근거 창출 펀드, 미국은 NTAP라는 한시적 수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은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에 맞춘 수가 체계의 개편이 요원하다. 하루가 멀다고 규제 개선 및 디지털 헬스케어 지원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본질에 맞는 수가 체계라는 핵심과는 동떨어져 있다. 한국이 진정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 혁신 성장, 규제 완화를 이룩하고 유니콘 스타트업을 키우고자 한다면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를 위한 마중물 수가의 신설은 최소한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