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지위·명성에 흠집…"너무 성급하게 시성됐다" 주장도

'성학대' 매캐릭 前추기경 신임한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논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의 시성(諡聖·가톨릭에서 특정 인물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행위), 너무 성급했나'
시어도어 매캐릭(90·미국) 전 추기경의 미성년자 성 학대 사건과 관련한 교황청 차원의 진상조사 보고서가 공개된 뒤 요한 바오로 2세를 성인(聖人)으로 선포한 것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가톨릭계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매캐릭 전 추기경은 1970년대 어린 신학생들과 동침하고 사제들과 성관계를 했다는 등의 의혹이 제기돼 2018년 추기경직에서 면직됐다.

또 작년 초에는 교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돼 사제직마저 박탈당했다.

교황청은 매캐릭 전 추기경의 비행 의혹에 대해 2년간의 진상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를 지난 10일(이하 현지시간) 공개했다.

이례적으로 거의 전문이 공개된 450쪽 분량의 보고서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2세는 매캐릭 전 추기경의 관련 의혹을 인지하고서도 진상 파악 등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매캐릭 전 추기경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사제와 동침한 것은 사실이나 성관계는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학대' 매캐릭 前추기경 신임한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논란
이후 미국 일부 대주교 및 주교들의 반대에도 2000년 매캐릭 전 추기경을 미국 워싱턴DC 대주교로 임명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가톨릭 교계제도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추기경직으로 승진시키는 등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보고서는 매캐릭 전 추기경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며 사실상 당시의 판단이 옳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언급을 해 시선을 끌었다.

교황청의 이러한 보고서를 토대로 가톨릭 교계 안팎에서는 요한 바오로 2세가 당시 제기된 의혹을 경시하는 등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론이 일었다.

이러한 비판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이 치밀한 사전 조사 없이 지나치게 성급하게 이뤄진 것 아니냐는 논란으로까지 확장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후 9년 만인 2014년 성인으로 선포됐다.

다음 교황으로 즉위한 베네딕토 16세는 선종 후 5년 뒤 시성 절차에 들어가는 규정을 깨고 몇 주 뒤 곧바로 심사를 시작하도록 했다고 한다.

'성학대' 매캐릭 前추기경 신임한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논란
피해자의 직접 진술을 통해 2018년께 매캐릭 전 추기경 관련 의혹이 사실로 굳어지는 전환점을 맞았기에 규정대로 5년간 대기 기간을 뒀다면 시성이 보류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독립적 종교 매체에서 활동하는 톰 리즈 신부는 16일 로이터 통신에 "매캐릭 전 추기경 관련 사안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이 너무 성급하게 이뤄졌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은 교회 내 정치와 더 관련이 있다"면서 "성인은 신자들의 삶의 모델이자 본받고자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진보적 가톨릭 매체인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NCR)는 13일 자 사설에서 미국의 주교들은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경축하는 공개 의식을 자제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다만, 모국인 폴란드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요한 바오로 2세를 두둔하는 쪽에서는 그가 매캐릭 전 추기경의 거짓 해명에 속았다며 의도적으로 의혹을 은폐하거나 묵살한 게 아닌 만큼 그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모국인 폴란드가 공산화돼 있을 당시 사제들을 음해하려는 거짓 성 학대 주장이 난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주님을 걸고 맹세한다'는 매캐릭 전 추기경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도 납득 못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