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가을, 유학차 막 도착한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있었다. 당시 레이건은 현직이던 카터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며 레이건에게 축하를 건네는 카터의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당시 우리나라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던 시점이라 더욱 그랬다. 한데 40여 년이 흐른 지금, 민주주의 이상과 관계없이 분열된 여론과 아름다운 승복이 실종된 미국 대선을 보노라니 마음이 씁쓸하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여론조사에는 반영되지 않은 소위 ‘샤이 트럼프’ 표가 상당히 있다는 것이 개표 결과 입증됐다. 자신의 트럼프 지지 의사를 공개하기 꺼리는 데는 뿌리 깊은 인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과실을 소수가 독점하는 시대에 경쟁에서 뒤처진 백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이민자나 흑인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백인들을 낮잡아 ‘레드넥’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 상당수를 점한다. 트럼프가 그들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해 사이다 발언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불과 50년 전까지 공공연하게 저질러졌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명연설 “아이 해브 어 드림(I have a dream)”이 울려 퍼진 것은 1963년이었다. 이후로도 한동안 미국 남부엔 학교, 버스, 심지어 수도꼭지까지 유색인용이 따로 있었다.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서 흑인을 대상으로 행해진 생체실험은 가히 충격적이다. 매독에 감염된 흑인들을 건강관리해주는 것처럼 속이고 방치해,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어떤 경과를 보이는지 지켜보는 실험이었다. 1932년 시작해 1972년에야 중단됐는데, 페니실린이 매독 특효약임이 밝혀진 것이 1947년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할 말을 잃게 된다.

물론 양식 있는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을 혐오한다. 그러나 샤이 트럼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편견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비단 인종 문제뿐 아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 역시 겉으로 얘기하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바이든이 승리선언 연설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자기와 다른 것을 ‘악마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화혁명이 진행되면서 개인 간 소통 채널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오히려 편견과 대립의 골이 깊어지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인공지능까지 동원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해주는 SNS와 미디어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결국 개개인의 양식에 따른 합리적인 태도와 가치 판단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합리성의 회복이 절실한 지금, 규제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하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탈을 쓰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일부 맞춤형 미디어에는 지혜로운 규제가 적절히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부디 합리성의 회복을 통해 분열된 모든 영역이 치유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