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고 SV인베스트먼트 본부장
정영고 SV인베스트먼트 본부장
“비상장 바이오 기업 투자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폭탄 돌리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죠.” 최근 바이오 투자업계 분위기에 대해 정영고 SV인베스트먼트 본부장은 이같이 말했다. 그는 “좋은 투자란 결국 저평가된 좋은 기업에 투자하는 것인데, 좋은 투자하기가 힘든 환경이 됐다”고 덧붙였다.

‘안전불감증’에 걸린 한국 바이오 투자업계

비상장 바이오 기업의 기업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결국 SV인베스트먼트는 2017년부터 비상장 기업에 대한 투자 비율을 줄이기 시작했다. 국내 비상장 바이오 기업의 기업가치가 계속 뛰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리즈 A-B-C 순으로 이어지는 투자 단계에서 기업가치가 점점 상향조정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 기관투자가가 어떤 바이오 기업에 100억 원이란 기업가치로 투자했다면 다음 투자 라운드에서 다른 기관투자가에게 100억 원보다 더 높은 기업가치로 지분을 넘기고 회수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또 심심치 않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정영고 SV인베스트먼트 본부장은 “벤처캐피털 외에도 사모펀드, 자산운용사에 이어 손이 큰 개인들까지 바이오 기업 투자에 뛰어들면서 유동성이 늘어난 게 큰 몫을 했다”며 “그 결과 실제 기업의 가치와 가격 사이의 괴리가 계속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치솟은 비상장사의 기업가치가 이젠 상장사마저 추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 본부장은 “인수합병(M&A)을 통한 회수 사례가 적은 국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기업공개(IPO)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기업가치가 고평가되다 보니 마지막엔 개인투자자에게 폭탄을 떠넘기는 사태가 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올해는 공모주 시장 분위기가 좋아 당장 표가 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해엔 큰 손해를 보는 투자자들이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국내 바이오 기업의 기업가치에 ‘버블’이 끼는 이유는 또 있다. 예전부터 꾸준히 지적됐음에도 고쳐지지 않은 고질적 문제다. 기업가치에 임상 실패 등의 위험요소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 본부장은 “실패하면 쪽박, 성공하면 대박이라는 식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피해 사례가 잊을 만하면 꾸준히 나온다”고 말했다. 지난해 코오롱티슈진 사태나 신라젠 사태 등이 대표적이다.

정 본부장은 “혹자는 바이오 ‘버블’에 대해 과거 ‘IT버블’을 예로 들며 버블이 있었기 때문에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이 나올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옥석을 가려 더 잘 투자했다면 더 많은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평가된 좋은 기업을 찾아라

정 상무가 꼽는 벤처투자의 기본은 저평가된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오래 투자하는 것이다. 정 본부장은 이 같은 원칙이 잘 지켜진 예로 2014년 펩트론 프리IPO 투자를 꼽았다.

당시 펩트론은 한국거래소 상장예비심사 단계에서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신 기업이었다. 보통 거래소의 심사 승인을 두 차례 이상 받지 못하면 그 기업에는 좋지 않은 꼬리표가 붙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50억 원 규모 전환사채(CB) 만기도 다가오고 있었다. 정 본부장은 “당시 펩트론은 곧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업이었다”고 했다. 투자업계에서 이 기업을 보는 가치도 자연스럽게 곤두박질쳤다.

정 본부장은 “이 회사의 기술력을 찬찬히 뜯어봤는데 상당히 수준이 높았고 사업성도 투자해볼 만하다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펩트론은 약제가 서서히 방출되는 서방형제제 기술을 보유한 회사였다. 그는 “다양한 약제에 적용할 수 있는 플랫폼적인 성격도 매력적이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상장심사에서 두 차례나 미끄러진 꼬리표가 붙은 기업이다 보니 SV인베스트먼트 내부에서도 쉽사리 투자 승인이 나지 않았다. 정 본부장은 “입사한 지 만 1년을 채운 신입이 대뜸 거래소에서 퇴짜 맞은 기업에 투자하겠다고 하니 많아야 두 번 열리던 투자심의위원회가 다섯 번이나 열렸다”며 “약 6개월간의 검토 끝에 납입을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검토 후 경영진도 흔쾌히 수락해 투자금액도 20억 원에서 50억 원으로 늘렸다. 결국 SV인베스트먼트는 이후 펩트론에서 투자금의 8.8배인 440억 원을 회수했다. SV인베스트먼트는 펩트론의 상장 후에도 후속 투자를 계속했다.

‘해자(垓字)’가 있는 기업을 찾아 투자하는 것도 정 본부장이 강조하는 투자철학이다. 해자란 중세시대의 성을 둘러싸 외부 침입을 어렵게 만드는 도랑이다. 2000년대 중반 워런 버핏이 사용하며 유명세를 탄 용어다. 정 본부장은 “회사의 기술력과 함께 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우위, 대표이사에 대한 신뢰도, 네트워크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해자 여부를 판가름한다”고 말했다.

SV인베스트먼트는 신약 벤처 올리패스가 이 같은 해자를 보유한 것으로 판단하고 투자를 결정했다. 정 본부장은 “이 회사의 약물전달 플랫폼이 이론적인 검증이 끝났다고 보고 투자를 집행했다”며 “단일 적응증 치료를 위한 약물이 아니라 다양한 치료제를 설계 및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이란 점을 ‘해자’로 봤다”고 말했다.

올리패스는 PNA라는 인공 유전자를 활용한 RNA 치료제를 개발하는 업체다. SV인베스트먼트는 이 회사에 2013년 157억 원을 투자해 390억 원을 회수했다. 투자한 157억 원 중 40억 원은 올리패스가 지난해 상장하고 보호예수 기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아직 회수하지 않았다. 정 본부장은 “상장 전에 있었던 몇몇 악재 등으로 올리패스의 주가가 아직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올리패스는 비상장사와 비교해 오히려 상장사의 가치가 더 저평가 된 대표적인 회사라고 본다”고 말했다.

어떤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나

[투자 고수 열전] 정영고 SV인베스트먼트 본부장 “‘해자’가 있는 저평가된 기업을 찾아라”
최근 바이오 투자업계의 화두는 ‘병용 치료’다. 키트루다 등 면역관문억제제는 이전 세대 항암제와 비교해 치료 효과가 우수한 대신 약이 잘 듣는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 간 차이가 크다. 그런데 면역관문억제제를 단독으로 사용했을 때보다 다른 치료제와 함께 사용했을 때 약의 응답성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약 개발 업계에서는 병용 치료에 사용할 ‘단짝 찾기’가 한창이다. 하지만 정 본부장은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기준 전 세계에서 약 3000개의 후보 물질이 병용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다”며 “올해엔 이런 후보물질 개수가 5000개에 이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이 얘기는 개발한 약물이 의료현장에서 병용 치료에 쓰이게 될 확률이 결국 수천분의 1이라는 뜻”이라며 “이런 리스크로 미뤄 볼 때 병용 치료에 쓸 물질을 개발하는 기업의 가치가 과도하게 뛰는 건 결국 거품”이라고 강조했다.

정 본부장이 선호하는 투자기업은 유행에 편승하지 않으면서도 차별화된 기술력(해자)과 플랫폼을 갖춘 기업이다. 특히 플랫폼은 이후 사업을 확장해 기업을 키워나가는 데 크게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인터뷰 도중 “10년 후에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투자를 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또 그는 “벤처캐피털(VC)이 굴리는 돈은 결국 국민 세금에서 나온 공적자금”이라며 “돈을 벌기 위한 투기가 아닌 미래를 위한 투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고집이 첫 직장에서 생긴 것 같다고도 했다. 정 본부장은 2002년 기술보증기금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기보에서 여러 벤처 기업의 경영자를 만나며 심사에 대한 ‘틀’을 배웠다” 며 “기보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모태펀드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2005년 외환은행을 거친 뒤 2012년 SV인베스트먼트에 합류해 바이오 기업 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기보에서 심사업무를 시작한 이래 그가 오랫동안 지켜온 철칙이 있다고도 했다. ‘잘 모르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술력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도 투자를 집행하지 않는다. 정 본부장은 “최근 유동성이 커지면서 기업에 대해 자세히 알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고도 했다.

투자에 앞서 그는 명확한 작용기전을 묻고 때에 따라선 추가 데이터나 실험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응하지 않는 기업이 늘었다고 했다. 그는 “이것저것 집요하게 따지는 VC 대신 상대적으로 쉽게 투자하는 개인투자 자나 자산운용사의 투자를 받는 벤처기업이 늘고 있다”고 했다. 또 “유명 벤처캐피털의 투자만 상징적으로 받으려는 기업들도 늘어 바이오 기업 투자 트렌드가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투자 고수 열전] 정영고 SV인베스트먼트 본부장 “‘해자’가 있는 저평가된 기업을 찾아라”
[투자 고수 열전] 정영고 SV인베스트먼트 본부장 “‘해자’가 있는 저평가된 기업을 찾아라”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