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 그랜드호텔 프로젝트에 10억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한경 CFO Insight] 위기에 투자 확대? 역발상의 위험과 기회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가 한창이던 2009년 4월 3일, 한진그룹은 놀라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1989년 인수한 지상 15층·지하 3층 규모 호텔에 1조원 넘는 현금을 투입해 LA 랜드마크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불황에 투자를 늘려 큰 과실을 얻겠다는 고(故) 조양호 회장의 ‘역발상’은 당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그룹의 경영 정상화를 어렵게 하는 짐으로 변해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항공 여객사업이 큰 어려움에 빠진 상황에서 호텔사업마저 개점휴업 상태에 빠진 탓이다.

2017년 문을 연 이 랜드마크 ‘윌셔그랜드센터(Wilshire Grand Center)’의 재무부담은 이제 지분 100%를 보유한 대한항공으로 빠르게 옮겨붙는 모양새다. 자산매각과 유상증자를 병행하고 있는 대한항공은 지난 달 18일 이 호텔 법인(HIC)에 9억5000만달러(약 1조1000억원)를 대여했다고 공시했다. 최근 자구책으로 기내식 및 기내면세품 판매사업을 팔아 번 돈(9906억원)보다 큰 규모다. 다른 곳에서 돈을 빌릴 만한 신용을 갖추지 못한 윌셔의 부담은 앞으로도 장기간 한진그룹의 발목을 잡을 전망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코로나19 사태까지, 경영환경을 예측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회사채 투자자들의 현금보유 기업 선호 현상도 강해지는 추세다. 신용평가사들은 이런 추세를 반영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기업의 신용등급을 더욱 까다롭게 평가하고 있다.

지난 20일 미국 인텔의 낸드(NAND) 사업 인수에 무려 10조3104억원을 투자하기로 한 SK하이닉스도 한동안 이런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김승범 한국기업평가 연구원은 “추가 차입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회사 재무비율이 이미 등급하향 기준에 근접해 차입규모 확정 시점에 현 AA 신용등급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기존 신인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현재 SK하이닉스의 신용등급을 투자적격 최하단인 ‘BBB-’로 부여하고 있다.

다만 주식 투자자들의 평가는 엇갈리는 분위기다. 과거 금융위기가 유럽의 재정위기로 올겨붙었던 2011년 말, SK그룹의 SK하이닉스 인수 기억 때문이다. SK텔레콤이 3조3747억원을 들여 인수한 SK하이닉스는 피인수 이듬해 영업적자를 냈으나, 2013년 3조원대 흑자를 냈다. 2017년 영업이익은 13조원을 넘어섰고 2018년엔 18조원대로 불어났다.

SK하이닉스의 극적인 영업실적 개선은 반도체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계속 늘어나는 ‘슈퍼사이클’ 덕이 컸지만, SK그룹의 전체의 신인도를 크게 끌어올리는 효과를 냈다. 덕분에 SK그룹 계열 회사채는 다른 대기업그룹을 압도하는 물량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작년 계열 회사채 공모 발행금액만 8조원을 웃돈다.

10년 전의 네 배로 오른 SK하이닉스 주가는 낸드사업투자 발표 당일을 포함해 3거래일 연속 떨어졌지만, 낙폭은 4%에 미치지 못했다. 23일에는 나흘 만에 0.72% 반등에 성공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