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의 법과 법정] 배럿은 어떤 점에서 보수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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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책적 관점 배제하려 노력하고
미국 헌법이 선언한 근본적인 가치들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보수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미국 헌법이 선언한 근본적인 가치들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보수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으로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법관을 지명하면서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반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긴즈버그 대법관을 진보의 아이콘이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말하는 진보, 특히 법관의 성향을 설명하는 진보(liberal)와 한국에서 말하는 진보(progressive)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배럿은 앤터닌 스캘리아 전 대법관의 로클럭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2017년 트럼프에 의해 제7연방상고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문자 그대로 법을 해석하는’ 원전주의자(originalist)다. 임신중단 반대 의견을 견지해 왔고, 본인 또한 임신 중 아기가 다운증후군임을 알고도 출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총기 소유 권리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를 지지한다. 이런 입장들은 보수적이라고 여겨진다.
미국에서 법관에 대해 보수적이라거나 진보적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뭘까? 어느 진영의 대통령이 지명했는지는 결정적이지 않다. 미국 대법관들은 종신제라서 특정 대법관을 지명한 대통령은 이미 수십 년 전의 인물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사이 사회 환경도 변하고 국민들의 규범의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미투운동이나 코로나 대유행 같은 사건은 법률문화나 규범의식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법관의 법률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긴즈버그 대법관을 지명할 때 그는 보수적 유대 문화에서 성장한 중도적 성향의 법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긴즈버그는 수십 년간 대법관으로 근무하며 사회적 갈등이 두드러진 많은 쟁점에 대해 주로 진보적 입장을 취했다.
과거 법률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고정돼 있으며 법관은 단지 그 의미를 해석해 선언하는 입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었다. 실제로는 법률에 대해 해석의 필요성이 늘 존재하며 문언(文言)의 통상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구체적으로 타당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때도 많다. 법관들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법질서 전체와의 조화를 고려한 체계적 통합적 해석, 논리적 해석 등을 동원하고 때로 목적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법관의 이런 적극적 법 해석이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법이 무엇인지는 법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고 살아 존재하는가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런 탐구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 객관적으로 연구 검증돼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한다. 이 연구에 따르면 법관들은 법 해석에서 각자의 믿음이나 가치관, 인격적 특성 등 법률 외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즉 객관적 법이 진공 속에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그 내용을 언제나 동일하게 해석해 선언할 뿐인 무개성한 법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법관은 자기의 소신과 가치에 따라 자기가 믿는 정의를 각자의 손으로 실현하도록 허용되는 것인가?
이 점에 관해 배럿은 “법관은 법률을 적혀 있는 대로 적용해야 한다. 법관은 정책 입안자가 아니며 스스로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정책적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사법 적극주의를 배척하고 문언 해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배럿은 보수적이다.
다만 원전주의에 대한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배럿은 헌법을 당초 입법 의도대로, 사회의 발전을 무시하며, 마치 ‘제임스 메디슨이라면 어떻게 해석했을까’의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의 기초에 관여한 사람은 여럿인데 그들이 입법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각 조문이 표현되고 문구화된 공적(public) 의미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법관이 아무리 문언적 법 해석과 직업적 양심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고 자제하더라도 법관의 개성과 가치관이 법률 해석에 스며드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까? 우선 각 법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화한 편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자기가 속하지 않은 다양한 소수자 집단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그 좋은 입문 내지 훈련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법률심의 경우 합의제로 재판하되 구성원을 다양화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대법원이 반드시 전원합의제로 운영될 필요도 여기에 있다.
배럿은 앤터닌 스캘리아 전 대법관의 로클럭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2017년 트럼프에 의해 제7연방상고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문자 그대로 법을 해석하는’ 원전주의자(originalist)다. 임신중단 반대 의견을 견지해 왔고, 본인 또한 임신 중 아기가 다운증후군임을 알고도 출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총기 소유 권리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를 지지한다. 이런 입장들은 보수적이라고 여겨진다.
미국에서 법관에 대해 보수적이라거나 진보적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뭘까? 어느 진영의 대통령이 지명했는지는 결정적이지 않다. 미국 대법관들은 종신제라서 특정 대법관을 지명한 대통령은 이미 수십 년 전의 인물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사이 사회 환경도 변하고 국민들의 규범의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미투운동이나 코로나 대유행 같은 사건은 법률문화나 규범의식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법관의 법률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긴즈버그 대법관을 지명할 때 그는 보수적 유대 문화에서 성장한 중도적 성향의 법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긴즈버그는 수십 년간 대법관으로 근무하며 사회적 갈등이 두드러진 많은 쟁점에 대해 주로 진보적 입장을 취했다.
과거 법률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고정돼 있으며 법관은 단지 그 의미를 해석해 선언하는 입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었다. 실제로는 법률에 대해 해석의 필요성이 늘 존재하며 문언(文言)의 통상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구체적으로 타당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때도 많다. 법관들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법질서 전체와의 조화를 고려한 체계적 통합적 해석, 논리적 해석 등을 동원하고 때로 목적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법관의 이런 적극적 법 해석이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법이 무엇인지는 법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고 살아 존재하는가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런 탐구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 객관적으로 연구 검증돼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한다. 이 연구에 따르면 법관들은 법 해석에서 각자의 믿음이나 가치관, 인격적 특성 등 법률 외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즉 객관적 법이 진공 속에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그 내용을 언제나 동일하게 해석해 선언할 뿐인 무개성한 법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법관은 자기의 소신과 가치에 따라 자기가 믿는 정의를 각자의 손으로 실현하도록 허용되는 것인가?
이 점에 관해 배럿은 “법관은 법률을 적혀 있는 대로 적용해야 한다. 법관은 정책 입안자가 아니며 스스로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정책적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사법 적극주의를 배척하고 문언 해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배럿은 보수적이다.
다만 원전주의에 대한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배럿은 헌법을 당초 입법 의도대로, 사회의 발전을 무시하며, 마치 ‘제임스 메디슨이라면 어떻게 해석했을까’의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의 기초에 관여한 사람은 여럿인데 그들이 입법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각 조문이 표현되고 문구화된 공적(public) 의미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법관이 아무리 문언적 법 해석과 직업적 양심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고 자제하더라도 법관의 개성과 가치관이 법률 해석에 스며드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까? 우선 각 법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화한 편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자기가 속하지 않은 다양한 소수자 집단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그 좋은 입문 내지 훈련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법률심의 경우 합의제로 재판하되 구성원을 다양화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대법원이 반드시 전원합의제로 운영될 필요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