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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전라감영' 복원 개장…조선왕조 500년 역사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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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때 소실된 선화당·관풍각·연신당 등 7개 건물 재건
    한옥마을 포함 전주 옛 도심 문화 심장 '핵심 공간' 자리매김
    전주 '전라감영' 복원 개장…조선왕조 500년 역사 되살아났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북과 전남, 제주를 관할했던 전라감영이 한국전쟁 때 폭발로 완전히 사라진 지 약 70년 만에 위풍당당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전북도와 전주시는 7일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에서 송하진 전북도지사와 김승수 전주시장, 김영록 전남도지사, 최기영 국가무형문화재 대목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라감영 재창조 복원' 기념식을 열었다.

    '찬란한 꽃, 천년의 열매 - 전라감영'을 주제로 한 기념식은 1884년 전라감영을 다녀간 미국 대리공사 조지 클레이튼 포크(1856-1893)의 사진 속에 담긴 승전무(국가무형문화재 21호)와 전라감사 교대식 공연으로 시작됐다.

    이어 복원사업 경과보고와 기념사, 환영사, 축사, 희망 보감 전달식, 현판 제막식 순으로 진행됐다.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정세균 국무총리와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은 영상으로 축하 인사를 전했다.

    한국국토정보공사는 부대행사로 전라감영을 지켜온 회화나무 씨앗과 전라감영 흙을 드론 3대에 매달아 동학농민혁명 발원지인 정읍·고창과 6·25 전쟁 피해 지역인 남원과 전북의 새로운 미래인 새만금으로 날려 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라감영 청소년 문화유산 해설사들은 복원 현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현장투어도 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라도를 관할했던 전라감영은 1951년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완전히 사라졌고, 이듬해 전북도청사가 지어졌다.

    전라감영 이전 논의는 도청사 이전 계획이 확정된 1996년부터 시작됐다.

    전주시와 전북도는 2017년부터 총 104억 원을 투입해 옛 전북도청사를 철거하고, 동쪽 부지에 선화당 및 관풍각, 연신당, 내아, 내아행랑, 외행랑 등 7개 핵심건물을 복원했다.

    폭발사고로 사라진 전라감영이 약 70년 만에 전라도를 통치했던 옛 위용을 되찾은 것이다.

    이날 기념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행사 규모가 최소화됐으며, 유튜브 라이브로 생중계됐다.

    시는 전라감영 서쪽 부지 등에 대한 2단계 복원을 검토 중이며, 활용방안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정비할 방침이다.

    복원된 전라감영은 애초 기념식을 기점으로 민간에 개방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추후 개방하기로 했다.

    전주 '전라감영' 복원 개장…조선왕조 500년 역사 되살아났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영상 축하에서 "전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도시로,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조선의 본향이자 전라도의 대표 도시"라며 "전라감영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 발돋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글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를 새긴 전라감영의 기념비는 전라도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북인의 자존의식을 한층 드높일 것"이라고 축하했다.

    김영록 전남도지사와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조선왕조 발상지인 전라감영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공간으로 만들어 (전주가)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기원한다 "고 말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도청사 이전부터 약 20년 동안 진행된 전라감영 복원사업에는 건축, 도시재생, 콘텐츠 분야 전문가는 물론 다수의 시민과 함께 토론을 통해 복원의 방향을 설정해 왔다"며 "복원된 전라감영은 전주의 자긍심이자 한옥마을을 포함한 전주 옛 도심 문화 심장 터(100만평)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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