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언제 어떻게 기원했을까? 그리고 민족주의가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뭘까?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이나 기원, 역사를 다루는 학제적 접근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갈린다.
민족이 근대에 탄생한 역사적 구성물이라고 보는 '근대주의' 입장과 민족이 근대 이전의 시기에 기원을 둔다고 보는 '전통주의' 입장이다.
이스라엘 정치·군사학자인 아자 가트와 역사학자인 알렉산더 야콥슨은 이 가운데 '전통주의' 입장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면서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에 상상되고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국내 번역·출간된 공저 '민족'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 종족이 언제나 고도로 정치적이었고, 민족과 민족국가는 수천 년 전 국가가 생겨난 이래로 존재해왔음을 보여준다.
책의 부제는 이를 압축한 '정치적 종족성과 민족주의, 그 오랜 역사와 깊은 뿌리'다.
저자들은 "근대주의 계율은 현재의 민족과 민족주의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실제로 이뤄진 큰 진전들을 극단적으로 과장함으로써 연구 방향을 크게 오도했다"면서 "근대주의·도구주의 이론가들은 종족·민족 현상의 깊은 뿌리를 보지 못하고 민족과 민족주의를 순수한 사회역사적 구성물로 취급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특히 "중세 유럽을 포함한 전근대 세계인들에게 민족 개념을 알려지지 않았거나 정치적 의미가 없었다는 생각은 근대 사회 이론이 범한 가장 큰 착오 중 하나다"고 비판한다.
이를 위해 이론적 논의와 핵심 개념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고, 수렵채집 집단에서 기원한 친족 집단이 씨족을 거쳐 부족으로 발전한 과정과 기원전 1만 년 전에서 5천 년 전 사이에 부족 조직으로부터 대규모 종족이 형성되고 종족 공간에서 국가가 형성된 과정을 개관한다.
책은 이어 고대 이집트와 중국을 비롯해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의 역사에 존재했던 국가와 민족을 살펴본 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에서 생겨난 민족국가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면서 민족이 대중 주권, 커뮤니케이션, 도시화, 이주 등 근대적 혁명에 의해 구성된 산물이라는 이론을 반박한다.
전근대에 이미 존재했던 대중적 민족 정서가 이런 혁신에 의해 해방·변형돼 훨씬 더 큰 힘을 갖게 됐을 뿐이라는 얘기다.
이번 저서는 종족·인족·민족을 단계적으로 구분한다는 점 등에서 이채롭다.
종족이란 상상 혹은 실제의 친족과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을 이르고, 인족이란 친족과 문화를 공유한다는 의식을 뚜렷하게 지닌 집단을 말한다.
그리고 민족은 친족과 문화를 공유한다는 의식을 뚜렷이 지님은 물론 국가 안에서 정치적 주권과 자치권을 가졌거나 이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저자는 인간이 종족이라는 특유의 집단을 이루는 현상은 자연적으로 진화한 인간 성향에 뿌리박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민족이라는 현상은 인간 본성에 토대를 두며,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가 원초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 책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으로 사례 연구를 확장했다.
그러면서 민족·민족주의 연구의 과도한 유럽 편중을 거듭 비판하며 여기에 깔린 전파주의적 가정을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