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년] ⑤ [인터뷰] 박재혁 의사 의거 100주년 준비위 최동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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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젊은 나이에 일제 경찰서장에 폭탄 투척…공적보다 안 알려져"
3·1운동 후 탄압으로 침체한 독립운동에 불쏘시개…평가 재조명 시급
외진 곳 동상부터 이전 추진…SNS·전시회 등 다양한 창구로 알리기 주력 "27살 젊은 나이에 목숨 바쳐 나라를 사랑한 청년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용기를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합니다.
"
광복 75주년인 올해는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박재혁 의사 의거 100주년이기도 하다.
의거 100주년을 맞아 박재혁 의사기념사업회가 지난 5월 창립하고서 박 의사의 애국애족 정신의 뜻을 받들어 그의 얼을 기리기에 나섰다.
최동희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1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박 의사는 그 공적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박재혁 의사를 기리는 사업을 시작해 다행"이라며 "의거 100주년과 순국 100주년을 맞아 지금이라도 박 의사가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895년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박재혁 의사는 부산 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를 졸업한 뒤 1917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홍콩, 싱가포르, 부산을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
1920년 의열단에 가입, 같은 해 9월 14일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켜 의열단 최초로 성공했다.
상소한 경성고등법원에서 1921년 3월 31일 사형이 확정됐으며, 수감 중 혹독한 고문 등에 시달리다가 폐병에 걸리는 등 고통을 겪었다.
온갖 고초 속에서도 "왜놈 손에 죽기 싫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며 긴 단식을 벌인 끝에 형 집행 전인 1921년 5월 11일 옥에서 순국했다.
박 의사 의거는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한 독립운동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적의 소굴에서 적장을 처단한 뒤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 27세 청년의 의거 소식은 동포들에게 다시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청년들에게는 항일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등 의거 뒤 항일 거사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후 박 의사는 국민들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지금의 부산 시민조차도 박 의사를 잘 알지 못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역사 교과서에서도 박 의사 공적은 한 문장이 전부다.
박재혁 의사가 조명받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최 사무국장은 "3.1운동 이후 엄격히 언론이 통제돼 있던 시대라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못했고 당시 신문에서 박 의사를 폐병으로 병사했다고 왜곡 보도한 이유도 크다"고 말했다.
이어 "박 의사가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다 보니 직계 후손이 없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며 "지역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자체 무관심도 큰 이유였다"고 말했다.
한 기업이 1998년 건립해 부산시에 기부채납한 그의 동상은 인적이 드문 수원지에 자리해 있어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동상은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내 성지곡 수원지에서 도보로 1.3㎞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데 차에서 내려 걸으면 15분 정도 걸린다.
기념사업회는 박 의사 동상 이전부터 추진하고 있다.
시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시민공원, 송상현 광장, 자성대 교차로 등으로 이전을 준비 중이다.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다음 달 14일까지 동상 이전을 목표로 했지만, 부산시와 협의가 아직 진행되지 못해 순국 100주년인 내년 5월 11일까지 이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동상 이전뿐만 아니라 박 의사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 훈격 상향, 국내외 학술교류, 기념 출판물 제작 배포, 초중등 교과서 등에 박 의사 공적 수록, 독립기념관 내 어록비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최 사무국장은 "여러 가지 사업이 준비 중이지만 가장 큰 목표는 목숨 바쳐 나라를 사랑한 박재혁 의사 뜻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라며 "시대에 발맞춰 유튜브, SNS, 전시회, 음악회 등 다양한 창구를 활용해 박 의사를 알리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3·1운동 후 탄압으로 침체한 독립운동에 불쏘시개…평가 재조명 시급
외진 곳 동상부터 이전 추진…SNS·전시회 등 다양한 창구로 알리기 주력 "27살 젊은 나이에 목숨 바쳐 나라를 사랑한 청년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용기를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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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인 올해는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박재혁 의사 의거 100주년이기도 하다.
의거 100주년을 맞아 박재혁 의사기념사업회가 지난 5월 창립하고서 박 의사의 애국애족 정신의 뜻을 받들어 그의 얼을 기리기에 나섰다.
최동희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1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박 의사는 그 공적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박재혁 의사를 기리는 사업을 시작해 다행"이라며 "의거 100주년과 순국 100주년을 맞아 지금이라도 박 의사가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895년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박재혁 의사는 부산 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를 졸업한 뒤 1917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홍콩, 싱가포르, 부산을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
1920년 의열단에 가입, 같은 해 9월 14일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켜 의열단 최초로 성공했다.
상소한 경성고등법원에서 1921년 3월 31일 사형이 확정됐으며, 수감 중 혹독한 고문 등에 시달리다가 폐병에 걸리는 등 고통을 겪었다.
온갖 고초 속에서도 "왜놈 손에 죽기 싫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며 긴 단식을 벌인 끝에 형 집행 전인 1921년 5월 11일 옥에서 순국했다.
박 의사 의거는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한 독립운동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적의 소굴에서 적장을 처단한 뒤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 27세 청년의 의거 소식은 동포들에게 다시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청년들에게는 항일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등 의거 뒤 항일 거사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후 박 의사는 국민들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지금의 부산 시민조차도 박 의사를 잘 알지 못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역사 교과서에서도 박 의사 공적은 한 문장이 전부다.
박재혁 의사가 조명받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최 사무국장은 "3.1운동 이후 엄격히 언론이 통제돼 있던 시대라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못했고 당시 신문에서 박 의사를 폐병으로 병사했다고 왜곡 보도한 이유도 크다"고 말했다.
이어 "박 의사가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다 보니 직계 후손이 없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며 "지역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자체 무관심도 큰 이유였다"고 말했다.
한 기업이 1998년 건립해 부산시에 기부채납한 그의 동상은 인적이 드문 수원지에 자리해 있어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동상은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내 성지곡 수원지에서 도보로 1.3㎞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데 차에서 내려 걸으면 15분 정도 걸린다.
기념사업회는 박 의사 동상 이전부터 추진하고 있다.
시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시민공원, 송상현 광장, 자성대 교차로 등으로 이전을 준비 중이다.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다음 달 14일까지 동상 이전을 목표로 했지만, 부산시와 협의가 아직 진행되지 못해 순국 100주년인 내년 5월 11일까지 이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동상 이전뿐만 아니라 박 의사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 훈격 상향, 국내외 학술교류, 기념 출판물 제작 배포, 초중등 교과서 등에 박 의사 공적 수록, 독립기념관 내 어록비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최 사무국장은 "여러 가지 사업이 준비 중이지만 가장 큰 목표는 목숨 바쳐 나라를 사랑한 박재혁 의사 뜻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라며 "시대에 발맞춰 유튜브, SNS, 전시회, 음악회 등 다양한 창구를 활용해 박 의사를 알리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