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죔토르 '정복왕 윌리엄' 번역 출간

영국 국왕 가운데 헨리 8세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군주로는 윌리엄 1세를 들 수 있다.

'정복왕'이라고 불리는 윌리엄은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흔히 그렇듯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역사적 평가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스위스 출신 중세학자 및 언어학자로 중세 프랑스 문학과 프랑스사 전문가인 폴 죔토르(1915~1995)의 '정복왕 윌리엄'(글항아리)은 프랑스적 시각에서 윌리엄의 생애와 그의 시대에 펼쳐진 역사를 기술한다.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접하는 영미권 자료들이 윌리엄의 난폭함과 냉혹한 통치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어권 연구자들은 그를 위대한 군주로 칭송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도 노르망디 공국 통치자인 공작의 사생아로 태어나 일곱살 때 아버지 지위를 물려받고 숱한 도전과 위기를 극복해가며 통치권을 공고히 한 것은 물론 국력과 인구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영국(잉글랜드)을 정복하고 난세를 평정한 영웅으로 윌리엄을 묘사한다.

윌리엄의 탄생과 정권 승계 과정은 동서양 많은 나라의 건국 신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극적이다.

정확한 시기와 경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윌리엄의 아버지인 청년 군주 '장엄공' 로베르가 사냥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개울에서 목욕하던 처녀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 처녀 아를레트는 1027년 말 또는 1028년 초에 윌리엄을 낳게 된다.

노르망디의 사생아 영국을 정복하다
산파가 막 태어난 아이를 짚을 깔아놓은 바닥에 누이자마자 아이는 손으로 짚을 한 움큼 쥐었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훗날 윌리엄이 영국 정복 전쟁에 나섰을 때 재소환된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 해안에 도착해 모든 병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선한 윌리엄은 모래사장에서 비틀거리다 넘어지고 말았다.

불길한 징조였고 이를 지켜본 병사들 사이에서는 공포의 탄성이 쏟아졌다.

윌리엄은 "주님의 영광으로! 봐라! 내가 이 땅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내 손에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고 외쳐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이때 한 기사가 주변 어부의 오두막집 지붕의 짚을 한 줌 쥐고 공작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리, 여기 영국 왕국을 바칩니다!"
로베르는 이미 정략 결혼해 배우자가 있었지만, 아를레트와 아들을 버리지 않고 수시로 아를레트가 사는 팔레즈 마을을 찾아 모자를 살폈다.

정실에게서 아이를 낳지 못한 로베르는 1035년 한창 젊은 나이였음에도 성지 순례를 떠나기 전에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후들을 불러놓고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소개했다.

그리고 순례 도중 병사한다.

비록 노르만의 풍습으로는 서자도 상속권이 있다고는 하지만, 성정이 거칠고 야망도 작지 않은 친척들과 제후들, 호시탐탐 영토를 노리는 경쟁국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권좌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국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궁정에 자객이 침입해 어린 공작의 눈앞에서 집사를 살해하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사건들이 잇따랐지만, 갖은 위험을 견뎌낸 어린 공작은 건장하고 거친 근육질의 청년으로 성장하고 공국도 점차 질서를 찾아간다.

윌리엄이 당시 기준으로 성인인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무정부 상태라고 해도 좋을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회복한 것은 노르망디의 행정체계가 그만큼 튼튼했고 경제도 건실했음을 반영한다고 저자는 풀이한다.

이러한 노르망디의 저력은 훗날 노르망디가 훨씬 더 크고 부유한 영국을 정복할 수 있게 한 밑바탕이 된다.

정세가 안정됐다고는 하지만 크고 작은 반란과 전쟁에 영일이 없던 윌리엄에게는 물론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다.

1066년 1월 영국의 군주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계 구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망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분명하지 않지만, 윌리엄은 자신에게 영국의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가 생전에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진위가 불분명하다고는 해도 당시 영국과 노르망디 공국 왕실이 혼맥으로 얽혀 있어 윌리엄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것이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웨섹스 백작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가 영국왕이 되자 윌리엄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무력침공하기로 결정한다.

노르망디의 사생아 영국을 정복하다
일리아스를 방불케 하는 많은 우여곡절, 행운과 불운의 교차 끝에 윌리엄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럴드는 윌리엄과 별도로 스칸디나비아에서 영국 동해안으로 침공해온 노르만군과 맞서 싸우느라 윌리엄의 침공군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 뒤늦게 남부 헤이스팅스에 당도해 전쟁의 명운을 가르는 전투를 치른다.

처절한 공방은 노르만군과 싸우느라 지치고 증원군의 도움도 제때 받지 못한 영국군을 윌리엄의 군대가 압도하는 양상으로 흘렀고 격전의 와중에 해럴드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윌리엄의 승리로 결론이 난다.

윌리엄은 뒷날 발견된 해럴드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후하게 장례를 치러줄 것을 지시한다.

윌리엄은 1066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갖고 영국 왕이 됐지만, 이후에도 그의 인생역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노르만인과 동맹국 사람들은 신 앞에 평등하며 영국인들의 권리는 보장되고 앞으로 강간, 살인, 절도와 관련된 죄는 엄중 처벌한다는 법령을 발포한다.

많은 영국의 제후들이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적지 않은 지역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노르망디의 사생아 영국을 정복하다
전쟁은 말년까지 윌리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087년 당시 기준으로는 고령이라고 할 60세에 접어든 윌리엄은 제대로 거동조차 못 해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처지였지만 프랑스와 국경 분쟁이 악화하자 다시 전쟁을 결심한다.

늙었지만 기백만은 여전한 윌리엄은 난장판이 된 전투에 뛰어들었다가 낙마해 치명적 손상을 입는다.

6주 동안이나 고통과 싸웠지만, 의식은 또렷했던 윌리엄은 아들들과 측근들을 불러 자신의 사후 국가 대사의 처리 방향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배반해 감옥에 갇혀 있던 동생 오동 드 바이외를 풀어주고 허가를 받지 않고 외국으로 떠난 벌로 몰수했던 한 기사의 영지를 되돌려주는 것까지 마음에 남은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해 9월 8일 편하게 잠을 자다 성당의 종소리에 잠을 깬 윌리엄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소리가 무엇인지 묻고는 "나 자신을 주님의 어머님께 의탁합니다.

나를 그녀의 아들과 화해시켜주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베개에 몸을 떨궜다.

52년 동안 노르망디 공작으로, 21년 동안 영국의 왕으로 통치한 군주의 마지막이었다.

책은 이 같은 윌리엄의 인생 역정과 함께 그 시대 서유럽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과 봉건 세계의 구조도 다룬다.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 특히 그가 크게 영향을 받는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맥락 속에서 윌리엄이 어린 나이에 군주의 자리에 올라 정복의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과정을 연대기식으로 서술하지만 어떤 결론을 내리거나 자신만의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력이 영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노르망디 공국이 영국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해서는 언급한다.

노르만국이라는 당시엔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과 엘리트 계층의 고급문화와 발달한 제도, 요새성의 건축을 통한 효과적 통치 등이 그것이다.

윌리엄의 정복 이후 영국에서는 약 100년간 노르만 왕조(1066~1154)가 이어지고 이 기간 영국은 문화와 언어는 게르만의 바탕에 라틴의 색채가 더해지게 되는 것은 세계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로마와 앵글로색슨족, 바이킹 등 끊임없이 외부의 침략에 시달리던 영국이 윌리엄 이후에는 또다시 외부 세력에 정복되는 일이 없게 됐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정복왕'은 영국을 '정복되지 않는 국가'로 만드는 데 초석을 깔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동섭 옮김. 608쪽. 3만원.
노르망디의 사생아 영국을 정복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