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의료진 초기대응 빨라…간호사들 헌신 덕에 위기 극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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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평택에서 대구 도우러 달려온 김병근 박애병원장
생활치료센터장 35일간 맡아
의료진 12명과 자원봉사 '한몫'
생활치료센터장 35일간 맡아
의료진 12명과 자원봉사 '한몫'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우리나라가 세계로부터 주목받은 것 중 하나는 세계 최초로 도입한 생활치료센터다. 생활치료센터는 코로나19 환자의 급격한 증가로 병원에서 모두 수용할 수 없는 경증· 무증상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공공기관이나 기업 연수원을 준 의료기관처럼 만든 곳이다. 경기도 평택의 김병근 박애병원장(54·사진)은 지난달 13일부터 대구은행연수원에서 생활치료센터장을 맡아 지난 16일까지 35일간 봉사를 했다.
김 원장은 12명의 공중보건의,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들과 함께 대구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데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1957년 개원한 박애병원은 평택지역 최초 종합병원으로 설립자가 2007년 인수해 지금은 250병상, 직원 250명 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뿐 아니라 충남 당진 서산 천안에도 널리 알려진 병원이다.
김 원장은 코로나19 습격을 받은 대구에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대구시의사회장의 호소에 박애병원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달려왔다. 그는 환자들에 대한 섬세한 손길과 자상한 돌봄으로 많은 퇴소자로부터 감사편지를 받았다. 함께 생활치료센터에서 근무한 김인환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 유치정책실장은 “대구가 폭증하는 환자들로 넘쳐날 때 맨 먼저 달려와 고글과 레벨D 보호복을 입고 손수 검채 채취를 하고 친절한 상담도 아끼지 않았다”며 “슈바이처 박사로 통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대학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의 무의촌을 다니는 등 어려운 곳을 보면 어디든 달려갔다. 국내에서 무의촌이 서서히 사라지자 필리핀 미얀마 중국 베트남 러시아 인도 등 해외 오지 의료봉사도 열심히 다녔다. 인도는 열 번 이상 다녀왔다.
김 원장은 대구에 온 간호사들에게 많은 공을 돌렸다. “의사들은 남의 병원 중환자실을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구에서는 특히 간호사분들의 노고가 컸다”며 “무급휴가로 자원봉사를 왔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오신 분 등 많은 간호사가 대구의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했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이분들의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대구은행 생활치료센터에서는 중증으로 악화돼 전원된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며 “대구시 공무원들도 동선관리 등 치료센터 조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코로나19로 힘든 우리 사회의 많은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도 못 하는 수많은 자영업자와 기업가, 취업준비생, 하루벌이로 살아가시는 분, 이미 가난했던 터라 더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을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그는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화장터로 보내야 했던 희생자의 남겨진 가족, 편견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환자와 격리자들을 보듬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2015년 메르스 때 큰 타격을 받은 경험 덕분에 경기지역 병원들은 선별진료소와 분류소 설치 등 빠른 대응을 했다. 김 원장은 “환자와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많은 병원과 의원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며 “방역과 치료의 핵심인 병원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정부에서 많은 지원과 대출절차 간소화 등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김 원장은 “대구가 사상 초유의 큰 위기를 겪었지만 대구 의료진과 대구시가 초기 대응을 아주 잘했다”며 “대구가 좋은 모델을 만든 만큼 대구의 방역시스템을 국제적으로 전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
김 원장은 12명의 공중보건의,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들과 함께 대구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데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1957년 개원한 박애병원은 평택지역 최초 종합병원으로 설립자가 2007년 인수해 지금은 250병상, 직원 250명 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뿐 아니라 충남 당진 서산 천안에도 널리 알려진 병원이다.
김 원장은 코로나19 습격을 받은 대구에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대구시의사회장의 호소에 박애병원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달려왔다. 그는 환자들에 대한 섬세한 손길과 자상한 돌봄으로 많은 퇴소자로부터 감사편지를 받았다. 함께 생활치료센터에서 근무한 김인환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 유치정책실장은 “대구가 폭증하는 환자들로 넘쳐날 때 맨 먼저 달려와 고글과 레벨D 보호복을 입고 손수 검채 채취를 하고 친절한 상담도 아끼지 않았다”며 “슈바이처 박사로 통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대학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의 무의촌을 다니는 등 어려운 곳을 보면 어디든 달려갔다. 국내에서 무의촌이 서서히 사라지자 필리핀 미얀마 중국 베트남 러시아 인도 등 해외 오지 의료봉사도 열심히 다녔다. 인도는 열 번 이상 다녀왔다.
김 원장은 대구에 온 간호사들에게 많은 공을 돌렸다. “의사들은 남의 병원 중환자실을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구에서는 특히 간호사분들의 노고가 컸다”며 “무급휴가로 자원봉사를 왔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오신 분 등 많은 간호사가 대구의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했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이분들의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대구은행 생활치료센터에서는 중증으로 악화돼 전원된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며 “대구시 공무원들도 동선관리 등 치료센터 조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코로나19로 힘든 우리 사회의 많은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도 못 하는 수많은 자영업자와 기업가, 취업준비생, 하루벌이로 살아가시는 분, 이미 가난했던 터라 더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을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그는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화장터로 보내야 했던 희생자의 남겨진 가족, 편견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환자와 격리자들을 보듬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2015년 메르스 때 큰 타격을 받은 경험 덕분에 경기지역 병원들은 선별진료소와 분류소 설치 등 빠른 대응을 했다. 김 원장은 “환자와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많은 병원과 의원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며 “방역과 치료의 핵심인 병원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정부에서 많은 지원과 대출절차 간소화 등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김 원장은 “대구가 사상 초유의 큰 위기를 겪었지만 대구 의료진과 대구시가 초기 대응을 아주 잘했다”며 “대구가 좋은 모델을 만든 만큼 대구의 방역시스템을 국제적으로 전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