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지식과 정보는 온라인 강의 아닌 공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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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없는 수도자 교육 상상하기 어렵듯
지식도 직접 만나 교류할 때 새 가치 창출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님을 알아야
김광현 <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
지식도 직접 만나 교류할 때 새 가치 창출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님을 알아야
김광현 <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대학 강의실과 캠퍼스가 텅 비어 있다. 수업이 온라인 강의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네르바스쿨 등을 언급하며 미래의 대학 교육은 세계 어디에서나 수강할 수 있는 온라인 강의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을 많이 내놓는다. 그렇게 되면 일방적으로 교수는 가르치고 학생은 듣기만 하는 대학에 굳이 입학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고, 대학은 교수와 학생이 모여 연구 중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곳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측한다. 교실, 캠퍼스, 대학가의 공간과 장소는 사라지고 대학이 연구소처럼 된다는 말이다.
얼마 전 회의에서 만난 후배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학과마다, 전공마다 교수를 다 두지 않아도 되겠죠? 그중에서 많은 과목은 전국에서 제일 잘 가르치는 교수 한 명만 있으면 될 테니까요.” 심상치 않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 강의가 ‘뉴노멀’이 되면 대학 강의는 미국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의 명교수와 전국구급 스타 교수의 강의로 대체될 것이고, 해당 대학교수는 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토론을 돌보는 조교 역할에 그칠 것이라고도 전망한다. 이렇게 되면 하버드대 교수는 정보의 생산자고, 학생은 정보의 소비자며, 한국의 교수는 정보의 해설자가 되고 만다. 슬픈 일이다.
강의가 정보라면 정보를 어떻게 생산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온라인 강의의 ‘온라인’이란 정보를 나르는 방식이지 정보 자체가 아니다. 그러면서 “학생은 미래의 교육 소비자” “교수는 온라인 강의에 서툰 공급자”라고 한다. 대학 수업이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오가는 소비재라는 말인가? 이는 대학이 학문을 세분해 이를 강의로 분담해온 탓이지만, 대학 강의를 상품을 늘어놓듯 지식을 파는 커다란 쇼핑센터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보는 사람을 직접 통하지 않아도 되므로 정보화 사회에서는 건축의 공간이 개입할 여지가 점차 사라진다고 한다. 풍부한 동영상으로 인해 영화관이 사라지고, 전자정보화로 인해 도서관이 사라지며, 대학 강의도 온라인으로 다 바뀔 것이라는 주장은 오래전에 이미 나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보기술은 장소에 따라 눈에 더 선명하고 손에 더 익숙하게 사람의 몸에 가까워지고자 애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보화사회에서는 정보가 많이 유통될수록 정보기술과 건축 공간 사이에 더 많은 사람이 개입해 자유로운 활동, 이동, 체류를 지지해주는 건축 공간을 더욱 요구하게 돼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다.
정보 인식은 21세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마라톤의 사자는 정보를 들고 뛰었고, 신드바드는 양탄자를 타고 정보를 전달했다. 이것은 지식과 정보란 흘러 움직일 때, 그리고 어떤 곳에서 사람이 직접 만나고 접촉하고 전달하며 집적될 때 비로소 새로운 가치가 풍부하게 생산된다는 인간의 염원을 늘 담고 있다. 그렇다면 1만㎡ 규모 건물 바닥은 1000㎡보다 10배 이상 정보를 더 잘 나르는 21세기 신드바드의 양탄자다.
학생이 학교라는 물리적 시설에 가지 않더라도 배울 기회가 많아졌다고 하자. 그러면 대학 강의는 장소에 구속되지 않고 물질로 형성된 건축을 통해 ‘배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 질서가 정보에 흡수돼 물리적인 장소 없이도 얼마든지 공동체가 전개되리라는 것과 같다. 불가능한 상상이다. 이런 논법대로라면 수도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들어가지 않아도 원격 교육으로 얼마든지 수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곧 교육은 아니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학교란 ‘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생과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생이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나무 아래’라는 장소와 공간에서 선생과 그를 둘러싼 학생들이 함께 논하고 가르친다는 교육의 본질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텅 비어버린 대학의 강의실과 캠퍼스를 보며 무릇 교육의 본질이 온라인 강의가 아닌, 공간과 장소에 있음을 다시 절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회의에서 만난 후배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학과마다, 전공마다 교수를 다 두지 않아도 되겠죠? 그중에서 많은 과목은 전국에서 제일 잘 가르치는 교수 한 명만 있으면 될 테니까요.” 심상치 않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 강의가 ‘뉴노멀’이 되면 대학 강의는 미국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의 명교수와 전국구급 스타 교수의 강의로 대체될 것이고, 해당 대학교수는 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토론을 돌보는 조교 역할에 그칠 것이라고도 전망한다. 이렇게 되면 하버드대 교수는 정보의 생산자고, 학생은 정보의 소비자며, 한국의 교수는 정보의 해설자가 되고 만다. 슬픈 일이다.
강의가 정보라면 정보를 어떻게 생산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온라인 강의의 ‘온라인’이란 정보를 나르는 방식이지 정보 자체가 아니다. 그러면서 “학생은 미래의 교육 소비자” “교수는 온라인 강의에 서툰 공급자”라고 한다. 대학 수업이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오가는 소비재라는 말인가? 이는 대학이 학문을 세분해 이를 강의로 분담해온 탓이지만, 대학 강의를 상품을 늘어놓듯 지식을 파는 커다란 쇼핑센터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보는 사람을 직접 통하지 않아도 되므로 정보화 사회에서는 건축의 공간이 개입할 여지가 점차 사라진다고 한다. 풍부한 동영상으로 인해 영화관이 사라지고, 전자정보화로 인해 도서관이 사라지며, 대학 강의도 온라인으로 다 바뀔 것이라는 주장은 오래전에 이미 나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보기술은 장소에 따라 눈에 더 선명하고 손에 더 익숙하게 사람의 몸에 가까워지고자 애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보화사회에서는 정보가 많이 유통될수록 정보기술과 건축 공간 사이에 더 많은 사람이 개입해 자유로운 활동, 이동, 체류를 지지해주는 건축 공간을 더욱 요구하게 돼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다.
정보 인식은 21세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마라톤의 사자는 정보를 들고 뛰었고, 신드바드는 양탄자를 타고 정보를 전달했다. 이것은 지식과 정보란 흘러 움직일 때, 그리고 어떤 곳에서 사람이 직접 만나고 접촉하고 전달하며 집적될 때 비로소 새로운 가치가 풍부하게 생산된다는 인간의 염원을 늘 담고 있다. 그렇다면 1만㎡ 규모 건물 바닥은 1000㎡보다 10배 이상 정보를 더 잘 나르는 21세기 신드바드의 양탄자다.
학생이 학교라는 물리적 시설에 가지 않더라도 배울 기회가 많아졌다고 하자. 그러면 대학 강의는 장소에 구속되지 않고 물질로 형성된 건축을 통해 ‘배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 질서가 정보에 흡수돼 물리적인 장소 없이도 얼마든지 공동체가 전개되리라는 것과 같다. 불가능한 상상이다. 이런 논법대로라면 수도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들어가지 않아도 원격 교육으로 얼마든지 수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곧 교육은 아니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학교란 ‘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생과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생이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나무 아래’라는 장소와 공간에서 선생과 그를 둘러싼 학생들이 함께 논하고 가르친다는 교육의 본질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텅 비어버린 대학의 강의실과 캠퍼스를 보며 무릇 교육의 본질이 온라인 강의가 아닌, 공간과 장소에 있음을 다시 절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