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과 얼굴, 옷은 온통 하얀 밀가루와 끈적한 계란으로 얼룩졌다.
그야말로 망연자실이고 만신창이다.
사진은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벌어진 일명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 밀가루 봉변' 사건이다.
앞서 5월 노태우 정부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된 그는 이날 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취임 전부터 맡아온 대학원 과정 교육학 특강 마지막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는 오후 6시 30분께부터 대학원 건물 418호 강의실에서 시작됐다.
7시쯤 강의실 앞에서 대학생 50여명이 "정원식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8시 종료 예정이던 강의는 7시 20분쯤 급히 중단됐다.
강의실을 나오자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학생들이 양측 출입구를 차단한 채 "물러가라", "끌어내자" 등 구호를 외쳤고, 경호관과 몸싸움이 크게 벌어졌다.
이 와중에 일부 학생은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학생들에 떠밀리던 정원식은 경호관들 부축을 받으며 일단 옆 416호 강의실로 피신했다.
7시 40분께 정원식은 문을 밀치고 들어간 학생들에 붙잡혀 건물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후 학생들이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고, 정원식은 계란과 밀가루로 범벅이 된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100여m를 떠밀려갔다.
이후 교문 앞에 이르러 경호관들이 학생들을 순간적으로 떼어 놓은 사이 교문 앞을 지나던 택시를 잡아타고 겨우 삼청동 공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원식이 떠난 후 전경 1개 중대가 투입됐으나 학생들과 충돌은 없었고, 정원식은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었지만, 병원에 입원할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봉변은 역대 총리 수난사 중 대표적인 사건이 됐다.
정원식은 지난 2011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당하지 않을 일을 당했다"면서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분위기는 그런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정원식이 지난 12일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황해도 출신인 정원식은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1962년부터 같은 과 조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1988년 노태우 정부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됐고, 이듬해 창립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관련 인사를 해임하는 등 강경한 조처를 하기도 했다.
가장 큰 업적으로는 남북기본합의서 서명을 꼽을 수 있다.
1991년 12월 11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골자로 한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1991∼1992년에는 남북고위급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기도 했다.
1992년 2월 19∼20일 평양에서 열린 6차 회담에서는 연형묵 정무원 총리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1992년 10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민자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 제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95년에는 서울시장 후보가 되기도 했다.
1997년부터 3년간은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직했다.
이후 '종북세력 청산' 등을 요구하는 단체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보수 성향 원로 교육학자들과 활동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