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 추 예일대 교수 '정치적 부족주의'서 의문 제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남베트남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이 분단국의 남쪽 사람들도 북쪽에 못지않게 미국을 증오했다.

미국은 환영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명분마저 잃고 고투하다 마침내 패배하고 말았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쫓아내면 그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라크 국민이 그동안 갈망하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대열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후세인 이후 이라크는 갈가리 분열돼 내전에 들어갔고 그 혼란은 지금도 계속된다.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 에이미 추아가 쓴 '정치적 부족주의'(원제 Political Tribes·부키)는 미국이 타국과의 관계에서 흔히 저지르는 오판의 원인으로 '부족'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든다.

부족이란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고 그에게 소속감과 애착을 갖게 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종, 지역, 종교, 분파 등 어느 것에도 기반을 둘 수 있으며 자발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미국은 민족 초월한 '슈퍼집단'으로 남을 수 있을까
베트남 전쟁의 실패는 어찌 보면 미국이 베트남 사람들의 부족 본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베트남에서는 인구의 1%밖에 되지 않는 화교가 부의 70~80%를 장악한 데 대다수 국민이 증오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남북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인종·민족적 측면을 놓친 미국은 베트남에서 친자본주의 정책을 펼친다는 것이 북쪽은 물론 남쪽에서도 대중의 분노를 촉발한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이런 실패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반복됐다.

이곳 사람들의 정체성도 국가가 아니라 민족, 부족, 종족을 기반으로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복잡한 종족 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이 냉전체제에 편승하려는 파키스탄에 휘둘려 소련에 대항하는 아프간 무자헤딘 전사를 지원했고 이는 훗날의 탈레반을 키워준 셈이 됐다.

또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는 파슈툰족이 주축인 탈레반을 몰아내고 파슈툰족 숙적인 타지크족 출신 부패 인사들을 지원해 아프간 국민 다수의 민심이 미국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

이라크는 소수인 수니파가 인구의 60%에 달하는 시아파를 억압적으로 통치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민주적 선거를 도입하면 그동안 억눌려왔던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해 수니파에 보복을 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우려가 미국의 침공 전부터 제기됐다.

실제 사담 후세인이 축출된 후 이라크에서 진행된 상황은 우려한 대로였다.

미국은 민족 초월한 '슈퍼집단'으로 남을 수 있을까
저자가 보기에는 이런 사례들은 미국이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관점에 근거해 다른 나라를 보기 때문에 저지른 실책이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은 온갖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민족보다는 국가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저자는 미국의 이 같은 특성을 '슈퍼 집단'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어느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도 구성원이 될 자격을 허용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위 집단들을 초월하는 더 강하고 포괄적인 집단 정체성으로 그들 모두를 한데 묶는 집단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미국이 처음부터 슈퍼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전쟁, 민권운동 등 고통스럽고 오랜 투쟁을 통해 이룩한 새로운 정체성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도 불평등이 만든 부족적 간극으로 찢기고 있어 슈퍼 집단으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보통 비서구 국가, 개발도상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부족주의의 파괴적인 동학이 미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배타적인 인종국가주의 운동, 대중에 대한 엘리트 계층의 반발,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반발, 과도한 특권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소수 집단에 대한 대중의 반발, 그리고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인 정치적 부족주의의 엔진 역할을 하는 상황 등이 그것이다.

2012년 5월 미국 월스트리트를 휩쓴 '점령하라' 운동이나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극단으로 치닫는 이념 대립 등은 이 같은 위험이 현실로 분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의 백인들도 두 부족으로 분열됐다고 진단한다.

하나는 정치 활동 참여도가 높고 코즈모폴리턴적 가치를 받아들인 도시와 연안지역 백인이다.

또 하나는 교육 수준이 낮고 인종주의적이며 애국적인 '농촌·중서부·노동자 계급' 백인이다.

월가 점령 운동가들은 '빈자'들을 위해 나섰다고 말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여기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깨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SNS에 올리는 이들과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외치는 이들은 서로를 경멸한다.

미국은 민족 초월한 '슈퍼집단'으로 남을 수 있을까
미국의 많은 식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트럼프의 당선과 아직도 견고한 그의 지지 기반을 '좌·우파 대결'이나 '인종주의'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두 부족, 즉 '백인 대 백인'의 적대와 분노가 미친 영향을 파악해야 미국 사회의 분열이 손에 잡힌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미국 사회의 앞날을 생각할 때 이는 분명코 불길한 조짐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저자는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 간 '면대면 접촉'을 강조한다.

그것도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증오가 깊어질 수도 있겠지만, 서로 이웃이 되고 접촉하다 보면 이해의 접점이 생기고 무조건적인 배제와 증오가 사라지거나 최소한 약해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실제로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저자는 미국이 언제나 위대한 나라가 아니었고 갈등으로 통합과 국가적 정체성이 흔들리면서도 위기를 이겨내고 더 다단해져 왔음을 상기한다.

저자는 다수의 진보적 지식인처럼 계층 갈등과 증오심을 부추기는 보수 우파를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좌파 진영에서 '그 약속은 늘 거짓이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과 우파 진영에서 '그 약속은 늘 사실이었으며 이미 달성됐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미국인의 관점에서, 미국과 미국인을 위해 쓴 책이지만 사람들이 이념이라는 부족 정체성에 갇혀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쁜 많은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김승진 옮김. 352쪽. 2만원.
미국은 민족 초월한 '슈퍼집단'으로 남을 수 있을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