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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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쇼크’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가는 가운데 북유럽의 핀란드에서는 ‘마스크 대란’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굳이 분류하자면 강소국 계열일 이 나라에는 마스크 대란이 없었다고 보도하며 뉴욕타임스는 흥미로운 분석을 했다. 철저한 사전 준비였다. 마스크 구입을 위한 길고 긴 줄이 오랫동안 계속된 나라, 정부의 행정력을 총동원하다시피해도 기본 수급이 어려웠던 나라, 마스크 보급난 때문에 대통령이 “국민께 송구하다”고 사과했던 나라, ‘마스크가 어느 날 '공적(公的) 물품'이 된 뒤 ‘국가보급 경제’에 대한 우려만 잔뜩 키웠던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핀란드에서 마스크 대란이 없었던 것은 위기 시에 대비해 기본 필수 물품을 제대로 준비해왔기 때문이라는 게 뉴욕타임스 보도의 요지다. 핀란드식으로 ‘프레퍼(prepper) 정신’이다. 의료 물자, 석유, 곡물, 농업 기자재, 탄약 재료 같은 것들이 국가 차원에서 사전에 충분히 준비돼왔다.

◆바이러스 한방에 흔들리는 하이테크(hightech)의 ‘멋진 신세계’

AI(인공지능) 빅데이터 로봇 기술이 선보인 멋진 신세계를 쫓으며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조금이라도 먼저 타려고 달리는 국면에서 부딪친 위기가 이번 코로나 쇼크다. 누구도 제대로 예상 못했다. 하지만 충격은 너무도 크다. 흔히 예상 못한 위기를 ‘블랙 스완’이라고 해왔지만 이럴 정도일 줄을 몰랐을 것이다. 자동화된 생산시설, 편리하고 안전했던 항공과 교통, 전문화·세분화 된 무수한 첨단 공장으로 말 그대로 하이테크(hightech) 시대에 대한 신기원을 열기 시작하던 국면이었다. 하이테크 찬가가 넘쳤고, 하이테크는 인류의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재와 자본이 몰렸고, 국가적 재원 역량이 집중됐다.

그런데 원시적 바이러스 한방에 뒤흔들리고 있다. 자칫 무너질 위기다. 바이러스와 '전쟁'이라는 말이 예사로 나온다. 알려진 대로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이 펜데믹의 발생이 박쥐같은 검증 안 된 야생 동물의 비위생적 도축과 식용,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21세기 하이테크 사회에서도 아주 기본적인 것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게 된다. 이런 기본적 자세와 역량, 습성을 로테크(lowtech) 라고 해두자. 하이테크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중국만 해도 하이테크 세계로 거침없이 달렸지만, 그럼으로써 미국과 이른바 기술경쟁 벌였지만 로테크는 다지지 못했던 것이다. 아스라한 하이테크 기술을 선도하며 중국과의 기술전쟁에서 리드해왔던 미국도 로테크에서는 부실했다는 비평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국가 차원에서 준비해온 마스크를 전국 병원에 공급한 핀란드를 돋보이게 한 것이 로테크다. 위기에 대비 품목은 방역과 기본 의료품, 식량, 생활 에너지 같은 것이었다. 고난도의 하이테크 제품이나 그런 기술이 아니었다. 위기에 대비한 정신과 기법은 ‘기본에 충실하기’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핀란드가 당초 전제한 위기는 일차적으로 전쟁이었다. 1939년 11월 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그들의 ‘겨울전쟁’에서 그들은 뼈저린 경험을 했다고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때부터 이웃 스웨덴으로부터 반복되는 침공과 지배를 받았으니 그들은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받은 것 같다.

지정학적 조건도 핀란드인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적지 않게 미쳤을 것이다. 이웃 스웨덴과 러시아는 북해와 접해 있어 나라 밖으로 통하는 길이 확실하다. 하지만 핀란드는 발틱해로만 해상 물품이 오갈 수 있다. 미리미리, 충분히 필수 생존 품목을 준비해둬야 하는 살아남는다. 이런 준비가 로테크다.

그들의 프레퍼 정신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 어떤 재난이 올지 모르니 미리 준비해두자는 것, 위기 때야말로 당장 생존에 필수 품목이 한층 중요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정도 아닐까. 이런 로테크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어디에나 중요한 것이다. 국가와 정부가 이런 것을 중시하고 전문적으로 잘 준비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해 나간다면 국민 개인들은 신경을 덜 써도 되지 않을까. 좋은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다.

◆로테크(lowtech) 다진 핀란드의 하이 콘셉트(high concept)

코로나 위기 대응에서 빛난 핀란드는 단순히 로테크 사회라고 하고 말기는 미안할 지경이다. 그들의 정신은 하이테크의 경지라는 차원에서 하이 콘셉트(high concept)라고 해두자. 기본에 충실하면서 위기가 닥쳐도 차분하게 대응하는 핀란드에 대해 ‘로테크, 하이콘셉트’의 나라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실제로 한때 휴대폰 노키아로 날렸고, 근래에는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돌려 한국보다 훨씬 잘 산다. 두 차례 핀란드 방문을 통해 관광과 디자인 등에서 노키아 이후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핀란드인들의 강한 의지를 엿봤던 경험이 아직 생생하다.

최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코르나발 식량위기 가능성을 경고한 적 있었다. 실제로 베트남 캄보디아 등이 쌀 수출을 않겠다고 했고, 러시아는 밀 수출 제한에 나섰다. 코로나 쇼크 여파로 식량자원의 국제 유통망까지 흔들리면 한국 같은 곡물 수입국은 어떻게 될까. 먹거리 확보야말로 로테크 중의 로테크 영역 아닌가. 이 유통망이 깨질 경우의 충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은 산유국간 치킨 게임으로 역(逆) 오일 쇼크라고 할 정도로 미증유의 저유가 경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게 반전돼 어느 날 급등해도 우리의 에너지 확보 물량에는 이상이 없을까. 현대의 기술 진보라는 관점에서 보면 원유 또한 생산부터 이동, 정제와 저장까지 대개 로테크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문에서도 과연 안전한가. 어느 듯 현실화된 북한 핵무기의 위험 문제도 그렇다. 하이테크 방어 전략과 기술 확보는커녕 로테크의 기본이라도 돼 있어야 위기에 맞서고 극복해 나갈 것 아닌가.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 기본을 다지자는 얘기다. (로테크의 의미에 거듭 주목하면서, 기자의 졸저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W미디어, 2013)를 조심스럽게 추천)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