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하고 너그러운 덕유산은 설악산, 지리산과 더불어 등산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이다.

남한에서 설경이 제일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눈과 등산객, 스키어와 관광객이 어우러지는 덕유산에 겨울왕국이 펼쳐진다.

[지금 여기] 얼음꽃 찬란한 겨울왕국 덕유산
◇ 상고대 아름다운 향적봉과 설천봉
이틀 이상 겨울비가 내린 다음 날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1,614m)과 설천봉(1,520m)에는 눈꽃과 상고대가 만발했다.

관광용 곤돌라가 운행되기를 기다렸다가 일찌감치 설천봉 정상에 도착했다.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설천봉은 그야말로 하얀 세상이었다.

자연설뿐 아니라 무주리조트에서 뿌린 인공설로 대지는 새하얗게 덮여 있고, 정상 위 쉼터 건물들의 기와지붕은 얼음꽃인 상고대로 뒤덮여 있었다.

언제 눈·비가 왔는가 싶게 아침 햇살은 맑고 투명하다.

눈과 상고대는 햇살 속에서 무한히 반짝거린다.

등산객과 관광객들이 곤돌라를 타고 속속 도착했다.

눈꽃과 얼음꽃을 렌즈에 담기 위한 것이리라. 저마다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덕유산의 눈꽃과 얼음꽃을 찍고 싶어 하는 사진작가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일반 관광객들도 연신 휴대전화로 덕유산의 설경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덕유산의 이름은 '덕이 많고 넉넉한 산'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바위가 적은 토산이기에 그런 느낌을 주지 않을까 짐작한다.

덕유산은 지리산, 설악산과 함께 한국의 3대 종주 코스로 꼽힌다.

봄에는 불타는 듯한 철쭉 군락으로, 여름이면 한국 계곡의 대명사이다시피 한 무주구천동으로, 가을에는 만산홍엽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에 겨울에는 최고의 설경을 더한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다.

그런 향적봉 턱밑까지 곤돌라가 설치돼 있다.

등산이 쉽지 않은 겨울에 설산이 그리운 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설천봉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20여분을 걸어 올라가면 향적봉에 닿을 수 있다.

비와 눈이 그치기 무섭게 등산인과 관광객들이 덕유산을 찾은 것도 향적봉의 설경을 가슴에 품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걸어서 향적봉까지 올라가는 산악인도 적지 않다.

필자가 덕유산을 찾은 날도 향적봉까지 걸어 올라온 등산객이 더러 보였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가는 길은 하얀 상고대 터널이다.

환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직접 보지 않고 말이나 글로는 느낌을 전달받기 어려운 광경이다.

상고대는 영하의 온도에서도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물방울이 나무와 같은 물체와 만나 생긴다.

나뭇가지에 물방울이 붙으면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게 된다.

순간적으로 생긴 얼음이기에 수빙(樹氷)이라고도 한다.

눈 내리고 상고대가 피는 날 덕유에는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설경이 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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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겨울 전반기까지 덕유산에는 눈이 별로 오지 않았다.

1월 초까지는 상고대도 별로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설천봉에서 관광객 쉼터를 운영하는 이호제(52) 대표는 덕유산에 올해처럼 눈이 내리지 않은 해도 드물었다고 말한다.

반면 며칠 동안 비가 왔는데 겨울에 이처럼 많은 비가 내린 적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관광객들에게 멋진 상고대를 감상하게 돼 행운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낯익은 사진작가들에게는 좋은 사진 많이 찍었겠다며 덕담하기도 했다.

고도가 높은 향적봉 쪽에는 비 대신 눈이 왔나 보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가는 길은 눈길이었다.

눈에 덮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길은 대부분 나무 데크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고, 계단이 많았다.

가파르지 않았고 난간이 있어 어린아이라도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었다.

다만 눈길이어서 아이젠을 착용해야 안전하다.

겨울 평상복에 운동화를 신고 온 관광객도 있지만, 대부분은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었다.

레저 활동 중에도 안전 수칙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확산하는 징표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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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봉에 오르니 상고대와 설경이 넋을 잃게 한다.

발밑으로는 한참 아래쪽에서 운해가 넘실거린다.

구름 위로 드러난 준봉들이 첩첩산중으로 장쾌하게 이어져 있다.

낮은 봉우리들은 낮은 대로 상고대를 인 채 구름에 그늘져 선경을 연출했다.

가슴 뭉클한 비경이다.

젊은 날에 알프스 몽블랑에 오른 적이 있었다.

몽블랑에도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었고, 만년설에 쌓인 몽블랑은 웅장했다.

그러나 청정하고 푸른 하늘 밑에서 국토의 중심부에 당당하고 우람하게 버티고 서서 상고대와 눈꽃을 활짝 피운 향적봉은 결코 몽블랑이 부럽지 않다.

어릴 때 우리 국토는 70%가량이 산이고, 평야가 적어 인간 삶에 불리하다고 배웠고 몇십년 동안 그것을 고정관념으로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도로가 그물처럼 촘촘히 깔리고 건축 기술이 발달해 수십층 짜리 아파트를 도깨비방망이 두드리듯 뚝딱 지어내는 요즘이다.

사람 살 땅이 좁은 건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됐다.

사람들 가까이에, 도심에서 한두 시간만 빠져나가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산과 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느 특정 지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든, 도심이나 삶의 터전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자연이 펼쳐진다.

고단한 여행자인 현대인에게 평화롭고 깨끗한 자연이 어느 정도 힘이 되는지는 우리나라에 등산인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우리 국토와 스위스를 맞바꾸자고 하면 달가워하지 않을 국민이 많지 않을까.

◇ 스키어들이 사랑하는 덕유산
덕유산은 산 애호가만 사랑하는 게 아니다.

겨울 덕유를 좋아하는 이들 중에 스키어들을 빼놓을 수 없다.

설천봉 밑에서 정상 쪽을 바라보면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는 이들로 북적대는 여러 슬로프가 눈에 들어온다.

무주덕유산리조트다.

슬로프 중에는 설천봉 정상부터 시작되는 것도 있다.

곤돌라나 스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서 설천봉 정상에서부터 기슭까지 스키와 스노보드를 타고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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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노랑, 파랑, 형형색색의 복장을 한 스키어들과 스노보더들이 다이내믹하게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를 떠올린다.

허리를 비틀며 슬로프를 사선 그리듯 내려오는 광경이 음악처럼 리듬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스키장에 가까이 가면 실제 흥이 난다.

가족, 친구, 연인들의 얼굴에 웃음과 즐거움이 가득하다.

슬로프 밑에 자리 잡은 식당, 장비 대여소 등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흐른다.

흥겹지 않을 수 없다.

스키와 스노보드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넘어지고 뒹구는 초심자, 중급자에게서 젊음과 청춘의 화사함이 풍긴다.

운동 후에 떡볶이, 어묵을 나눠 먹는 가족, 친구들의 표정은 꿀맛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50대 이상의 여성 스키어들이 제법 많다.

젊었을 때 스키를 배운 멋쟁이들인가 보다.

눈이 오고 안 오고는 스키장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눈이 많이 오면 교통이 불편해져 스키 손님들이 줄어든다.

눈이 오지 않더라도 추울 때가 스키 타기에 좋다.

인공설의 상태가 좋기 때문이다.

인공설을 만들고, 유지하기 가장 좋은 기후 조건은 영하 3도, 습도 70% 안팎이다.

그래서 올해 눈이 별로 오지 않은 것은 스키장 운영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덕유산리조트에는 뜨끈뜨끈한 노천탕이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 남녀가 함께하는 노천탕은 슬로프 바로 옆에 있어 피곤을 푸는 순간에도 스키장의 활력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스키를 타러 오면 꼭 노천탕에 들러는 마니아들이 있다고 한다.

◇ 매혹적인 무주구천동 계곡의 겨울
무주구천동 계곡의 겨울은 여름만큼이나 매력적이다.

비 온 뒤여서 물이 불어나 있었다.

비췻빛 맑은 물이 굽이굽이 용트림하며 계곡 바닥을 내리꽂듯 쏟아져 내렸다.

물소리가 짐승의 포효처럼 우렁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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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바로 옆에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계곡을 그처럼 가깝게 느끼면서 걸을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흙길, 돌길, 나무 데크길, 다리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향적봉에서 불과 2㎞ 정도 떨어져 있는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계곡 길의 상당 구간이 가파르지 않은 평탄한 길이다.

구천동 계곡 70리에는 13개의 대(臺), 10여 개의 못, 20개의 폭포가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오후 늦게 시작한 탐방이라, 계곡 입구에서 한 시간 정도만 걸어 올라갔다.

구천동 계곡 33경 중 15경인 월하탄, 19경인 비파담은 올라갈 때, 20경인 다연대는 내려올 때 감상할 수 있었다.

구천동계곡을 빼놓고는 겨울왕국 덕유산을 말할 수 없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