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섭 화백이 서울 양재동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백색을 찾아서’를 설명하고 있다.
신양섭 화백이 서울 양재동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백색을 찾아서’를 설명하고 있다.
하얗고 파란 질감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라. 붓끝에서 피어난 백색 기운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푸른색으로 번진다. 하얀 화면에 수직과 수평의 엷은 붓자국만 남기는 이른바 백색 그림이다. 장독대에서 정성으로 기도하던 어머니 앞의 정화수에 비친 하늘과 보름달의 세계를 응축한 ‘백색을 찾아서’란 제목의 이 그림은 2010년 한국 화단에 ‘하얀 단색화의 파장’을 몰고 왔다. 바로 단색화 경향의 하얀 그림을 개척한 신양섭 화백(78)의 작품이다.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등이 국제 화단을 유랑자처럼 누비며 ‘미술 한류’의 전사처럼 싸울 때, 그는 변방에 앉아 오로지 백색 하나로 단색화의 기량을 보여줬다. 서구 양식을 두서없이 도입했던 한국 화단에서 그의 외로운 분발이 놀랍다.

오는 1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열리는 ‘신양섭 개인전’은 이런 작가의 정신을 오랜만에 돌아볼 수 있는 자리다. 10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백색의 마술’. 1980년 이후 제작한 ‘하얀 추억’을 비롯해 ‘내안의 풍경’ ‘백색을 찾아서’ 시리즈 등 백색 그림 20점을 건다. 달항아리와 같은 한국 특유의 백색미를 담아 미술이 고요하고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는 걸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미대(옛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신 화백은 1981년 열린 마지막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서양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올해로 화업 50년을 맞은 그는 원래 하얀 색조를 바탕으로 한국의 자연 풍광을 단순화시켜 화면을 채웠던 구상화가였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풍경을 캔버스에 삼각형, 원형, 사선, 터치 등의 얇은 천 조각으로 콜라주한 뒤 흰 물감으로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되살려냈다. 하지만 2010년부터 닥죽을 활용해 형상을 지워가며 하얀 색면에 치중했다. 둥글둥글하게 닥죽을 반죽해 화면을 ‘쟁기질’하듯 청정한 백색과 청색으로 가득 채웠다.

신 화백이 굳이 닥이라는 재료를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크릴 물감은 오래되면 그림 표면에 자꾸 금이 가 다른 재료를 연구했습니다. 내구성과 한국적 질감 표현에 탁월한 닥을 사용하면 안료의 기름기를 걸러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아크릴 물감과 젯소(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회화 재료), 그리고 닥을 사용해 화면에 일정한 두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색료의 질감은 그만큼 순화되죠. 닥죽에서 오는 질박한 질감이 바탕을 덮어가면서 화면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순백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죠.”

닥을 사용해서인지 그의 작품은 서구 미니멀리즘 작품들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기보다는 어디선가 본 듯한 푸근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흰색에서 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순맛’ 같은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눈에 파묻힌 산골 마을처럼 사물의 윤곽이 흐릿하게 지워진 그의 그림 속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두고 온 고향, 혹은 잊고 있었던 자연이 오롯하게 살아있다.

신 화백은 요즘도 서울 양재동에 있는 작업실로 매일 출근해 하루 15시간가량 작업한다. 그렇게 작업실에 앉아 있어야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아침마다 구룡산에 오릅니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뭇잎, 돌, 집 등이 영롱하게 빛이 나요. 거기에서 본 풍경을 마음 속에 채집했다가 화실로 돌아와 흰색으로 버무립니다. 캔버스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자연을 넣고 반복적으로 붓질하면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거든요.”

신 화백은 “화려함보다는 질박함, 굳이 드러내려 하기보다는 안으로 침묵하는 이의 원숙함을 추구한다”며 “내 작품세계와 그 가치를 지키는 것은 오직 나뿐일 것이고 찾는 이가 없어 고독하다면 그 역시 숙명”이라고 강조했다. 하얀 그림 앞에 서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설기 같은 지순한 정감의 세계가 가멸차게 피어오르는 것은 그의 이런 예술 철학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