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도학자인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는 명월 황진이. 아름답고 섬세하지만 절제된 시에 더해진 그의 애틋한 연애담은 영화와 드라마로 수없이 극화하고 변주됐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도 전해지는 이런저런 염문들에 비춰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남자들과의 관계에 의존한 삶을 살았을까.
우리 고전문학을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게 해석하는 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신간 '한국고전문학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을 통해 당대 종합예술인으로 이름을 날린 기녀들의 시와 삶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할 단서를 제공한다.
"그런데 실제로 황진이처럼 강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이 남성을 향한 사랑만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을까? 과연 당대 일류 기생들이 생각하는 것이 남성뿐이었을까?"(p.99) 저자는 당시 기녀들의 실제 삶을 살펴보면 시조에 담긴 절절한 연심에는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미국 버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염요'라는 책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송별 잔치에서 공주 지역 기생들에게 이별을 주제로 한 시조와 가사를 짓게 하고 백일장처럼 등수를 매겼다는 얘기가 실려있다.
"절절한 노랫말에도 불구하고 전후 정황을 감안하면 진정성이 있는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저 해마다 있는 서울에서 온 관리들을 보내는 송별식에서, 명령에 따라 상투적인 시상과 시어로 만든 노래로 여겨진다.
"(p.100) 책은 시조, 향가, 판소리, 야담, 소설 등 우리 고전문학의 주제, 묘미, 흐름을 새롭게 개괄하고 그간 학계에서 축적한 여러 연구 성과를 알기 쉽게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탈민족주의, 페미니즘, 퀴어이론 등 새로운 문학 연구 경향을 반영한 흥미롭고 현대적인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시인으로, 수필가로, 번역가로 다채롭되 세속에 물들지 않은 글을 남긴 작가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1910~2007)을 기억하노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로 마무리되는 ‘인연’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그것이다.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작품을 읽고 자란 세대라면 절대 못 잊을, 설렘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간직한 첫사랑에 대한 절절한 표현을 담은 작품이다. 또,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조용한 길이다.”로 시작하는,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이라고 할 수도 있는 '수필'이란 작품 또한 '인연'과 함께 피천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피천득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를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우리 수필 문학계의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수필가의 면모는 피천득 문학세계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실제로 그가 문학세계에 처음 이름을 올린 것은 수필이 아니라 시를 통해서였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으로 등단한 뒤 잡지 <동광>에 시 ‘소곡(小曲)’(1932),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했다. 1947년 첫 시집 『서정시집』을 출간한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 대다수 사람에게 각인된 것처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909년 10월 26일 아침.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18살 소년에 불과했던 유동하의 도움이 있었다. 유동하는 안중근, 우덕순 등을 포함한 7명과 함께 구국혁신을 맹세하는 ‘7인동맹’을 조직했다. 이토가 하얼빈 역에 도착한다는 전보를 안중근에게 보내 의거를 성공으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역사 판타지 소설 <밤의 학교> 속 주인공들은 당시 유동하와 똑같은 18살 고등학생들이다. 하얼빈 의거로부터 100년 넘게 지난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고등학생 허지환과 그의 친구들은 학교에서 국내 최초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의 엽서를 발견하고, 학교에서 밤을 새우던 중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들은 헤이그 특사 3인부터 안중근, 윤봉길, 윤동주 등 독립운동가를 차례대로 만나 함께 거사를 준비한다.저자는 2021년 한경신춘문예상을 수상한 허남훈 작가. 첫 장편작 <우리가 거절을 하는 방식>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소설이다. 그가 역사 판타지 소설 <밤의 학교>를 쓰게 된 계기는 지인이 수집한 엽서를 보게 되면서다. 허 작가는 "누군가의 내밀한 이야기가 세월의 흔적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있는 엽서들이었다"며 "이 엽서들이 개인의 추억이면서 시대의 조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허 작가는 권기옥이 안창호에게 보낸 엽서를 떠올렸다. 엽서가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그 문을 열고 독립운동가들을 만난다는 이야기의 구상은 이렇게 시작했다. 허 작가는 학창 시절 통학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에서 밤을 보냈던 추억을 더해 <밤의 학교>
지난해 본 영화 중 나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작품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퍼펙트 데이즈>로 정했다. 우연히 집에서 다시 보는 동안 크게 감명하고 만 것이다.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어느 변기 칸에서 한 남자아이를 발견한다. 사정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울고 있었던 듯하다. 시무룩해 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던 그는 곧 아이의 엄마와 마주친다. 내내 찾고 있었던 듯 아이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온 엄마는 아이를 붙잡고 잠시 그를 확인하고는, 물티슈를 꺼내 아이의 손을 닦고 그 자리를 떠난다.여기까지 봤을 때, 이 영화가 벌써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특정 계층을 대표할 작중의 누군가를 쉽게 악인으로 만드는 듯해서. 그런데 엄마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던 아이가 짧게 뒤를 돌아보더니 히라야마에게 손 인사를 하고 그 순간 그는 활짝 웃는데, 그 웃음이 내 이런저런 계산을 단번에 씻겨줄 정도로 해맑아서 마음이 확 풀렸다.이어지는 장면들은 히라야마의 매일매일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 분재에 물을 주고, 면도를 하고, 집 앞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고, 테이프를 넣고 음악을 들으며 차를 몰아 일터로 가고, 근처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다 이파리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오래된 카메라로 담고, 일이 끝나면 목욕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서점에 가거나 단골 가게에서 술을 마신 뒤 책을 읽으며 잠에 드는 시간들. 일을 하러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큰 골자는 동일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그 일상이 우리의 하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 영화의 인상적인 부분은 주인공인 히라야마가 대체로 말이 없다는 점이다. 아예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