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할머니 산불 사망자 인정받고도 한전 책임 회피에 유족 '분통'
더딘 보상에 지친 소상공인·이재민 '울며 겨자 먹기' 주택·영업장 재건
[2019 사건 그후] ③ "강원산불 아픔은 진행형"…피해주민 한숨 여전
'대형산불'이 동해안을 덮친 4월 4일, 화마(火魔)는 우리 가족에게서 사랑하는 엄마(70)를 빼앗아갔다.

강풍을 타고 산불이 번지자 속초에 사는 오빠가 고성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해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마을 대피 방송을 듣고 마을회관으로 향하던 엄마는 결국 강풍으로 떨어진 주택 지붕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엄마를 땅에 묻었던 날은 바로 '엄마의 생일'이었다.

일찍이 미망인이 된 엄마는 힘들게 오빠와 나를 키웠다.

앞으로는 맛있는 것도 더 많이 먹고, 여행도 자주 가고, 자식 된 도리를 다하려고 했는데 무심한 하늘은 엄마를 돌려주지 않았다.

엄마의 주변을 정리하면서 엄마가 화재보험을 들어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96년 고성산불 때 소 외양간을 잃고, 2000년 동해안 대형산불 때 집을 잃으면서 엄마는 '산불 노이로제'에 걸렸던 거다.

엄마는 우여곡절 끝에 '산불 사망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산불 원인을 제공한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는 피해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만 한다.

[2019 사건 그후] ③ "강원산불 아픔은 진행형"…피해주민 한숨 여전
산불로 인해 집에서 나오게 한 책임은 있으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강풍에 지붕이 날라오지 않았으면 사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해괴망측한 이유로 엄마의 죽음을 부정했다.

산불이 바람을 타고 번진다는데 집에 가만히 앉아서 TV만 볼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산불로 인한 차량 통제는 엄마를 살릴 '골든타임'마저 앗아갔는데 오빠와 나는 그저 원통하기만 하다.

엄마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외할머니(94)는 엄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지난달 30일 엄마가 있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산불은 우리 엄마뿐만이 아니라 오빠의 직장도 앗아갔다.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한 카센터에서 일했던 오빠는 하루아침에 생계가 막막해졌다.

오빠가 일했던 카센터 사장인 박영식(48) 오빠는 20년 넘게 운영했던 카센터를 잃었다.

[2019 사건 그후] ③ "강원산불 아픔은 진행형"…피해주민 한숨 여전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현장 보존이 중요하다는 말에 영식 오빠는 잿더미가 된 카센터를 아직도 철거하지 못하고 있다.

닦고, 조이고, 기름 쳤던 그곳에는 까맣게 타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만이 남았다.

피해액이 7억원 정도 된다는데 손해사정사는 감가상각을 적용해 절반인 3억5천만원으로 집계했고, 실제로 받을 수 있는 피해 금액은 3억5천만원의 60%에 불과하다고 한다.

26살에 직장을 나와 청춘을 바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이제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장비들이 즐비했던 영식 오빠 카센터의 가치는 산불로 인해 반의반 토막이 나버렸다.

영식 오빠는 "보상은 둘째 치고 영업손실이 너무 크다"며 불에 탄 카센터를 철거하고, 재건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2019 사건 그후] ③ "강원산불 아픔은 진행형"…피해주민 한숨 여전
"정부에서 저금리로 대출을 해준다지만 빚내는 게 두렵다"는 오빠는 "국민 성금이라는 큰 도움으로 그동안 생계를 유지했으나 바닥을 보이고, 단골손님들로부터 '복원이 됐느냐'고 연락 올 때마다 괴롭다"고 했다.

이미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손해를 감수하고 다시 장갑을 끼겠다는 오빠들이 걱정이다.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 어르신들은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낼 것 같다고 한다.

이맘때면 월동 준비가 한창이지만, 마을에는 중장비가 쉴 새 없이 오가고, 집 짓는 소리가 종일 끊이질 않는다.

피해 보상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임시조립주택에서 살 수만은 없기에 빚을 내서라도 집을 짓는 거란다.

40대인 영식 오빠도 빚을 내기 두렵다는데 벼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70∼80대 어르신들은 오죽할까.

장천마을에서 나고 자란 박만호(71) 할아버지는 "이 나이에 빚내면 갚을 수 있나.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2019 사건 그후] ③ "강원산불 아픔은 진행형"…피해주민 한숨 여전
만호 할아버지는 46년 전 지은 한옥을 산불로 잃었다.

지금 다시 한옥 양식으로 지으려면 돈이 꽤 많이 들지만, 손해사정사가 평가하는 가치는 그에 한참 못 미친다.

그렇다고 집을 대충 지을 수도 없는 일. 마을 어르신 대부분이 빚을 내 집을 짓고 있다.

적게는 몇만원에서 많게는 몇천만원까지 하는 농기계와 각종 살림살이를 잃은 걸 생각하면 만호 할아버지는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밭을 매립하고 들어선 임시조립주택에서 여름은 무난하게 보냈으나 과연 보온효과가 있을지, 겨울나기가 가장 큰 걱정이다.

산불을 수차례 겪었다는 어르신들임에도 그날을 떠올리면 말문이 턱 막힌다고 한다.

산불 트라우마 때문인지 금방 생각한 것도 잊어버릴 때가 많고, 지금도 정신이 멍할 때가 있다고 한다.

만호 할아버지는 "산불 나고 나서 피해품목 적어내라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야지. 지금도 너나없이 '나 그때 뭘 빼먹었다'고 해. 아줌마 2명은 병원에도 다녔어"라고 말했다.

[2019 사건 그후] ③ "강원산불 아픔은 진행형"…피해주민 한숨 여전
그런데도 국민 성금에 피해 보상금액까지 이재민들이 '한 몫 두둑이 챙겼다'는 누리꾼들의 댓글은 아직도 순박한 시골 어르신들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고성·속초산불 원인을 수사한 강원 고성경찰서는 지난달 말 한전 직원 7명과 유지·관리를 담당하는 시공업체 직원 2명 등 9명을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고 한다.

경찰은 국과수 감정 결과를 토대로 산불 원인을 수사한 결과 전선 자체의 노후, 부실시공, 부실 관리 등 복합적인 하자로 인해 전선이 끊어지면서 산불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했다.

가해자 처벌도 중요하지만, 하루빨리 이재민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고 아픔과 상처가 치유돼 삶의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2019 사건 그후] ③ "강원산불 아픔은 진행형"…피해주민 한숨 여전
[※ 이 기사는 산불피해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산불로 인해 모친 박석전(70)씨를 잃은 안영미(45)씨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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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