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심 판결 뒤집어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5일 경북 문경시에 있는 한 공기업 근로자 김모씨가 회사를 상대로 “임금피크제로 줄어든 임금을 지급하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원고 승소 취지로 수원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간부급 근로자로 노조원이 아닌 김씨는 회사와 2014년 3월 기본 연봉을 약 7000만원으로 정한 연봉계약을 체결했다. 같은해 6월 회사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 위해 노조 동의를 얻어 취업규칙을 변경했다.
그러나 김씨는 본인이 임금피크제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모두 김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은 “근로자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변경된 취업규칙은 노조의 집단적 동의를 받았다고 해도 더 유리한 조건의 개별적 근로계약에 우선할 수 없다”며 “(김씨는) 취업규칙 변경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연봉을 삭감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조계와 노동계에선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비슷한 소송이 줄을 이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간부급 근로자는 대부분 노조원이 아니어서 노사 합의를 거부하고 소송을 제기하면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 근로자 측을 대리한 김기덕 변호사는 “다른 공공기관, 금융권 등의 근로자들이 비슷한 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노사 합의해도 근로자가 거부하면 무효"…'임피 불복' 줄소송 예고
취업규칙 형식으로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노동조합 동의를 얻었더라도 개별 근로자가 거부하면 효력이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단체협약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더라도 비노조원들의 개별 동의를 받지 않은 사업장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은 근로자들이 깎인 임금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도 분쟁이 벌어질 수 있다. 법조계와 노동계에서는 노조에 속하지 않은 근로자들을 중심으로 유사 소송전이 잇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法 “유리한 근로계약 우선 적용”
경북 문경시에 있는 공기업 A사는 2014년 6월 소속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조의 동의를 받아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그 전에 회사에서 면직당했다 복직한 김모씨는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아 삭감된 임금을 지급받자 반발했다. 김씨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 3개월 전 이미 회사와 연봉 7000만원의 근로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김씨는 “노사 합의 사항을 비노조원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2년 동안 깎인 임금 총 1억1500여만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 2심은 모두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취업규칙 변경 절차가 적법했으므로 그 효력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A사의 노조는 2급 이하 직원은 입사와 동시에 조합원이 되고, 김씨는 1급 직위로 노조원은 아니긴 하지만 직급 체계상 2급에서 1급으로 승진이 가능한 점 등을 고려할 때 해당 노조가 집단적 동의 권한을 가진다고 봐야 한다”며 “(김씨에게만) 기존의 연봉제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이 잘못됐다고 봤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한 취업규칙은 근로조건의 ‘최하한’에 불과하다고 못 박았다. 대법원은 “근로기준법 제97조에 따르면 취업규칙은 개별적 노사 합의라는 형식을 빌려 취업규칙이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근로조건을 감수하도록 하는 것을 막아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취업규칙에서 정한 기준보다 유리한 근로계약이 있다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취업규칙 내용을 변경하는 데 노조가 동의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특히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인한 연봉 삭감 등과 같이 근로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경됐다면 개별 근로계약이 우선이다. 대법원은 “노조의 집단적 동의는 취업규칙을 변경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라며 “근로자의 개별적 동의가 없는 한 취업규칙보다 유리한 근로계약 내용을 적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씨는 임금피크제 도입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변경된 취업규칙은 무효”라고 덧붙였다.
“공공기관·금융권 추가 소송 준비 중”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처음으로 “취업규칙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변경됐더라도 개별 근로계약이 우선적으로 효력을 가진다”는 법리를 제시했다. 노사 단체협약이 아니라 취업규칙만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장엔 근로자들의 임금 소급 청구 소송이 몰아칠 가능성이 높다. 단체협약에 임금피크제가 명시된 사업장에도 비노조원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정년을 앞두고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은 근로자는 비노조원인 경우가 많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법률원 출신 김기덕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을 노동계가 상당히 주목하고 있다”며 “확신이 없어 소송을 망설여온 여러 공공기관, 금융권 등 근로자들도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연봉제를 도입한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매년 개별 근로자와 연봉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근로자가 임금피크제를 거부하는 등 분쟁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근로자가 연봉계약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해고하면 부당해고로 간주될 수 있다. 한 노동 전문가는 “연봉제는 정부가 연공서열형 임금체계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임금체계 개편을 적극 지원하면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라며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로 임금체계 개편도 발목이 잡히게 됐다”고 분석했다.
신연수 기자/최종석 전문위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