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부부 '우리는 모두 형제다' 출간

웬만한 초등학생도 앙리 뒤낭이라는 이름은 들어 봤을 것이고 상식이 풍부한 중고생이라면 그가 적십자 운동의 주창자이며 노벨평화상 첫 수상자라는 정도는 알 법하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영예와는 걸맞지 않게 그가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고 동료들의 배반, 빚쟁이의 추적에 대한 우려로 말년까지 불신과 불안의 은둔 생활을 하다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국제적십자사연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뒤낭의 생애 후반기를 중심으로 한 그의 삶과 적십자 운동을 재조명하는 책이 나왔다.

저자는 다름 아닌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과 스위스에서 역사를 공부한 그의 부인 오영옥 씨다.

가난과 불운에 시달렸던 '적십자의 아버지'
널리 알려진 대로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금수저'로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낭은 31세였던 1859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군대가 격돌한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를 찾았다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국적과 이념을 떠난 전쟁 구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책 제목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는 솔페리노 현지에서 어느 편인지를 따지지 않고 부상병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던 현지 부녀자들이 인류애를 강조하면서 외쳤던 말이라고 한다.

뒤낭이 이때의 경험에다 사후 추가 조사한 각종 자료를 더해 지은 책 '솔페리노의 회상'은 전 유럽에서 선풍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뒤낭은 높아진 명성을 동력 삼아 전쟁 부상자들을 구조하고 간호하기 위해 훈련된 자원봉사자들의 단체를 모든 나라에 설립하자는 제안을 해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이는 적십자 운동으로 이어졌다.

가난과 불운에 시달렸던 '적십자의 아버지'
그러나 이때부터 이미 뒤낭의 개인적인 불운이 잉태되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농업에 투자한 그는 사업에는 수완이 없었던 듯 경영난에 내몰리고 있었고 솔페리노의 전장을 찾아간 것도 사실은 나폴레옹 3세 황제에게 사업 편의를 봐 달라고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67년 막대한 빚을 끌어들여 추진한 그의 사업은 파산했고 채권자들로부터 민형사 소송에 직면하게 되자 제네바를 떠나 도피의 유랑길에 올라야 했다.

믿었던 동료들로부터 배신당해 적십자 추진 운동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 등지를 전전하면서도 명성 덕택에 각종 사교 모임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초대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끼니도 때우기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다.

타국을 떠돈 지 20여년 만인 1887년 스위스 북동부 국경지대 요양지 하이덴으로 옮겨온 뒤낭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깡마르고 병약하고 가난한 59세 중늙은이에 불과했다.

고국 스위스에서는 종적이 끊긴 뒤낭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스위스의 한 잡지사가 그의 종적을 확인했고 1895년 사진과 함께 근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후 인류 평화를 위한 뒤낭의 활동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그의 비참한 노년에 대한 동정론이 비등했다.

자연스럽게 뒤낭에 대한 후원이 줄을 이어 생활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이즈음 알프레트 노벨이 창설한 노벨상의 첫 평화상 수상자로는 그만한 적격자가 없다는 여론이 조성됐고 1901년 많은 이가 예상한 대로 그는 노벨의 얼굴이 새겨진 메달과 약 10만 프랑의 상금을 받게 된다.

노벨상 상금은 지금도 10억원의 가치에 육박할 정도로 큰돈이지만, 이 상을 받은 뒤에도 각종 서류를 보관하기 위한 방 하나를 더 얻은 것 이외에 그의 생활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신과 인간적인 교류의 단절, 괴팍스러움, 이유가 불분명한 불안 등 정신적 피폐함은 더욱더 깊어졌고 육체도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이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인류애의 구현과 평화 실현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그의 집념은 쇠퇴하지 않았다는 데서 그의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고 동가숙서가식 생활을 하는 중에도 뒤낭은 전쟁포로 처우 개선과 국제재판소 설립 운동에 앞장섰고 각국 적십자사를 통합하는 국제적십자연맹 설립을 위해서도 힘을 기울였다.

1893년에는 남녀의 동일임금, 자녀 양육에 관한 부모의 공동책임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측근에게 일본으로 구호활동을 떠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1910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것은 상자 17개 분량의 책과 원고, 각종 서류뿐이었다.

죽음을 예감하고 사망 석 달 전에 써둔 유서를 통해 자신의 쓸쓸한 노후를 돌봐준 몇몇 사람에게 약간의 유산을 남기고 노벨평화상 상금을 포함한 나머지 재산은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했다.

저자들은 뒤낭이 사업에 실패하고 모든 것을 잃은 채 온 유럽을 헤매는, 말하자면 노숙자나 걸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도 평화운동, 녹십자 설립과 같은 활동에 앞장섰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라는 말이 있지만 곳간이 비어있음에도 앙리 뒤낭의 인심은 결코 메마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가난과 불운에 시달렸던 '적십자의 아버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