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린 피가 얼어붙은 추위"…장진호전투 회고한 美참전용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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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전쟁 후 첫 방한…"한국 발전상에 자긍심"
"장진호전투에서 제가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았던 건 피가 얼어붙어 지혈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추웠습니다.
"
미군 전사(戰史)상 최대 격전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6·25전쟁 장진호전투(1950년 11∼12월)에 참전한 헨리 쉐이퍼(88·미 해병 1사단 병장) 씨는 당시의 추위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옆에 앉은 밀튼 워커(89·미 해병 1사단 상병) 씨는 "영하 35∼40도 정도 됐다"면서 "추위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두 노병(老兵)은 27일 서울 중구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호텔에서 참전 경험을 들려주는 자리에 참석했다.
전쟁 후 첫 한국 방문이다.
작은 목소리지만 또렷하게 말문을 연 쉐이퍼 씨는 장진호전투를 "가장 두려운 전투"로 기억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모두 4번 총상을 당했다.
그는 "어느 날 자정 무렵 우리 부대가 공격을 당하기 시작했다.
밤새 3발을 맞고 고지를 내려오다가 1발을 더 맞고 쓰러졌다"며 "다른 해병이 갑자기 나타나 저를 질질 끌고 내려와 지프에 태웠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여러 차례 수술한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한쪽 팔과 다리를 잃었다.
운전과 통신 임무를 수행했던 워커 씨는 자신이 몰던 지프가 피격으로 폭파된 일을 떠올렸다.
그는 "다행히 참호에 몸을 숨겨 나는 많이 다치진 않았다"면서 "차가 폭파된 건 별로 속상하지 않았는데 전날 안에 넣어둔 쿠키와 주스가 사라진 건 슬펐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어 "장진호전투 때는 3주간 식량이 전혀 없는 상태로 지내야 했다"며 "아슬아슬한 상황이 많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면 저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유엔군 3만여명과 중공군 12만여명이 전투를 벌여 유엔군 약 1만7천명, 중공군 약 4만8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워커 씨의 가족은 '군인 가족'이기도 하다.
아들은 공군 예비역, 손자 둘은 공군과 육군에서 각각 현역으로 복무 중이며 손녀는 공군 군의관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한국인에게 해주고픈 이야기가 있냐는 질문에 워커 씨는 "1950년 9월 서울은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쉐이퍼 씨도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의 환대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쉐이퍼 씨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이유는 참전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다"라며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를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26일부터 5박 6일 일정으로 이들을 비롯한 미국·터키의 참전용사 33명과 가족 등 77명을 초청했다.
참전용사들은 비무장지대(DMZ)와 임진각 등을 둘러보고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는다.
/연합뉴스
그 정도로 추웠습니다.
"
미군 전사(戰史)상 최대 격전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6·25전쟁 장진호전투(1950년 11∼12월)에 참전한 헨리 쉐이퍼(88·미 해병 1사단 병장) 씨는 당시의 추위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옆에 앉은 밀튼 워커(89·미 해병 1사단 상병) 씨는 "영하 35∼40도 정도 됐다"면서 "추위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두 노병(老兵)은 27일 서울 중구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호텔에서 참전 경험을 들려주는 자리에 참석했다.
전쟁 후 첫 한국 방문이다.
작은 목소리지만 또렷하게 말문을 연 쉐이퍼 씨는 장진호전투를 "가장 두려운 전투"로 기억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모두 4번 총상을 당했다.
그는 "어느 날 자정 무렵 우리 부대가 공격을 당하기 시작했다.
밤새 3발을 맞고 고지를 내려오다가 1발을 더 맞고 쓰러졌다"며 "다른 해병이 갑자기 나타나 저를 질질 끌고 내려와 지프에 태웠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여러 차례 수술한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한쪽 팔과 다리를 잃었다.
운전과 통신 임무를 수행했던 워커 씨는 자신이 몰던 지프가 피격으로 폭파된 일을 떠올렸다.
그는 "다행히 참호에 몸을 숨겨 나는 많이 다치진 않았다"면서 "차가 폭파된 건 별로 속상하지 않았는데 전날 안에 넣어둔 쿠키와 주스가 사라진 건 슬펐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어 "장진호전투 때는 3주간 식량이 전혀 없는 상태로 지내야 했다"며 "아슬아슬한 상황이 많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면 저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유엔군 3만여명과 중공군 12만여명이 전투를 벌여 유엔군 약 1만7천명, 중공군 약 4만8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워커 씨의 가족은 '군인 가족'이기도 하다.
아들은 공군 예비역, 손자 둘은 공군과 육군에서 각각 현역으로 복무 중이며 손녀는 공군 군의관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한국인에게 해주고픈 이야기가 있냐는 질문에 워커 씨는 "1950년 9월 서울은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쉐이퍼 씨도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의 환대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쉐이퍼 씨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이유는 참전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다"라며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를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26일부터 5박 6일 일정으로 이들을 비롯한 미국·터키의 참전용사 33명과 가족 등 77명을 초청했다.
참전용사들은 비무장지대(DMZ)와 임진각 등을 둘러보고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