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아침] 고영훈 '여름 달'
17~18세기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는 아무 장식 없이 둥실하고 풍만하다. 하얀 달덩이처럼 미소를 뿜어내는 듯한 자태에 괜스레 안겨보고 싶어진다. 모든 고민과 상처를 어머니의 품처럼 품어줄 것 같은 넉넉함이 모태의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인 화가 최초로 1986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한 극사실주의 화풍의 대가 고영훈(68)은 이런 달항아리를 징그러울 만큼 정밀하게 묘사한다. 전통 조선시대 도자기 미학을 붓으로 재현한 그림은 충격적이고, 때론 기이한 그림으로 받아들여진다. 달항아리를 허공에 붕 떠 있는 듯 그린 그의 ‘여름 달’ 역시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구현해낸 작품이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조선백자를 소장자에게 빌려다 놓고 거기에 쌓인 세월과 공간의 흔적까지 담아냈다. 옛 도공의 혼을 그대로 녹여내려 했고, 우리 민족의 순박한 심성을 순백의 색채와 달덩이 형태로 승화하려 애썼다. 달항아리를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투영해 당대의 기호와 욕망, 가치까지 인물 사진을 촬영하듯 화면에 올려놓았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묘사하지만 아름다운 ‘일루전의 세계’를 명징하게 재창조한 게 이채롭다.

“옛 도자기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은폐해 놓은 비밀의 트릭을 하나하나 능란한 붓질로 수놓았다”는 고 화백의 말이 살갑게 다가온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