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침략에 맞선 대한독립군의 역사상 첫 승리를 그린 영화 '봉오동 전투'가 한국과 일본과의 심각하게 불편해진 관계에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하듯 완벽한 타이밍으로, 국민적 이목을 끌고 있다.

거액(190억원)을 들였고, 캐스팅도 성공적이다.

로케이션(강원 정선, 제주)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전투가 벌어졌던 만주 봉오동(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과 비슷한 지형을 찾는 데 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영화 속 전투 현장 재현이 나무랄 데 없었던 데 비해 정작 실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정확히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학계에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중고교 역사 교과서를 포함해 봉오동 전투 현장을 설명하는 글에는 대부분 봉오저수지 사진이 붙어 있다.

전투 현장이 지금은 저수지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의 상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매우 큰 저수지다.

중국 정부가 '봉오골반일전적지' 기념비를 세운 곳도 봉오저수지 인근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지금까지의 통설을 뒤엎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봉오동 또는 봉오골이라 불리는 지역은 골짜기를 따라 밑에서부터 하촌, 중촌, 상촌의 3개 마을로 구분될 수 있는데, 저수지는 하촌 인근에 있고, 실제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던 곳은 하촌에서 직선거리로 8∼10㎞가량 올라가야 하는 상촌 근처라는 것이다.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계간지 역사비평 최신호에 기고한 글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다시 보기'에서 "우리는 그동안 전투 현장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을 기억해왔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 글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가 상촌 근처에서 벌어졌다는 언급은 이미 2000년에 있었다.

연변의 역사학자 김춘선은 "봉오동 어구에서 20여 리쯤 올라가자 작은 평지가" 나타났는데 그곳이 전투 현장이라고 언급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까지 가미한 검증이었으니 신뢰할 만한 분석이라고 신 소장은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엉뚱한 곳을 역사의 현장으로 기념해왔던 셈이다.

신 소장은 "몇차례 잘못된 현장 검증이 통설로 굳어져 오는 가운데 정확한 전투 현장이 어디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무관심했었다"며 이번을 계기로 역사적으로 잘못된 사실이 바로 잡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같은 봉오동이면 됐지, 10㎞ 정도가 뭐 대수냐고 생각할 사람이 혹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 '장소'는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한번 의미를 부여한 장소를 쉽게 잊지 못하는 존재다.

장소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장소를 위한 투쟁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봉오동 전투처럼 무장 항일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그리고 절대적인 힘의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맞서 대승을 거뒀던 '장소'야말로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 '집단기억'이다.

특정 장소와 사건에 대한 공동체의 집단기억은 결국 제의적인 역할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을 추모할 정확한 장소가 필요하다.

그들의 처절했던 항일과 독립에의 의지, 잠시였지만 승리의 기쁨, 목숨이 끊긴 사람들의 넋두리까지, 그들의 탄식과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벤야민은 앞서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졌다고 했는데, 우리가 가진 그 메시아적 힘이란 바로 우리의 기억 속에 과거를 정확히 소환하는 일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