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 미술가 김순기,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게으른 구름'
1970년대부터 근작까지 실험적 여정 소개
"아방가르드 예술이란 이상한 짓 아닌, 소통하고 나누는 것"(종합)
1975년 9월 중순, 추석을 코앞에 둔 서울 광화문 미국문화센터는 '김순기미술제'를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당시로써는 낯선 '미술제' 정체를 알려고 중앙정보부까지 탐문에 나섰다.

센터 내부에서는 프랑스에서 날아온 32살 작가 김순기가 주도하는 토론회와 상영회, 전시가 엿새간 이어졌다.

"그때 전위미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다 왔어요.

여자, 젊은 여자, 아니 기집애가 (미술에) 잔소리한다고 건방지다고 했지. 난 그랬어, 당신네처럼 깡패처럼 장악하는 게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소통하고 나누는 것, 모르면 질문하는 것이 아방가르드라고. 이상한 짓 하는 게 아방가르드가 아니야."
44년이 지났지만 김순기(76)의 생각도, 말도 무뎌지지 않았다.

김순기는 남성·계파 중심의 국내 미술계에서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한때 '마녀'로 불리기도 했다.

31일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개막하는 '게으른 구름'은 왕성한 활동상에도 국내에서는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김순기 예술 세계를 뒤늦게 소개하는 자리다.

"아방가르드 예술이란 이상한 짓 아닌, 소통하고 나누는 것"(종합)
1970년 색깔 헝겊을 잘라 널어놓은 작품 '소리'는 그리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경계를 넘으려 애써온 김순기의 예술을 예견한다.

"바람에 펄럭대는 소리가 시원하더라고요.

작품이란 걸 했다는 기분이 처음 들었어요.

사각 틀에 갇히는 그림과 달리, 소리는 한계가 없었어요.

"
이듬해 도불한 김순기는 철학자,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예술과 삶을 고찰했다.

'제2 백남준'으로 불렸지만 설치, 퍼포먼스, 드로잉, 회화도 자유롭게 넘나든 김순기에게서는 다원예술 선구자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29일 미술관에서 만난 작가는 "같은 것을 계속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을 또 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조형상황'은 1971∼1975년 남프랑스 바닷가에서 현지 학생들과 연, 풍선을 날린 프로젝트다.

미술관은 "김순기는 예술을 캔버스에서 작가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닌, 열린 시·공간에서 만들어진 상황 아래 이뤄지는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시기 작업실 주변 사물을 주워다가 글씨를 새기거나 판화를 찍거나 장기판을 만든 '일기' 작업은 예술은 일상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에서 따온 전시명 '게으른 구름'이 은유하는 예술의 의미, 삶의 태도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이란 이상한 짓 아닌, 소통하고 나누는 것"(종합)
백남준과 함께 색동천 캔버스에 함께 시를 쓴 퍼포먼스인 '봉주르 백남준' '활쏘기-회화' 작업에서는 한국 전통을 향한 끌림이 묻어난다.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려는 '바보 사진'은 동양 정신과 통하는 면이 있다.

7전시실에서는 한국 첫 개인전인 '김순기 미술제', 1986년 존 케이지·다니엘 샤를 등을 초청해 연 멀티미디어 페스티벌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 등 연대와 소통을 중시한 여정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다음 달 8일 전시마당에서 작가는 '심심바보 영희'로 명명된 로봇, 무당 김미화와 함께 신작 사운드 퍼포먼스를 할 계획이다.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한국 여성작가를 돌아보려는 시도로서도 의미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27일까지.
"아방가르드 예술이란 이상한 짓 아닌, 소통하고 나누는 것"(종합)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