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만나 10여년의 세월에 걸쳐 인연의 끈을 이어온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멜로 영화다.
영화 '해피엔드' '사랑니' '은교' 등에서 파격적이면서 도발적인 멜로를 선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평범한' 멜로다.
작품성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10대, 20대를 거쳐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성의 정수를 담아냈다는 뜻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영화 '사랑니'를 보면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냐'라는 대사가 나온다"며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이야기에 끌린다"고 말했다.
극 중 현우(정해인)는 제과점을 운영하던 대학생 미수(김고은)와 우연히 만나 기적 같은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두 사람을 갈라놓고 우연한 만남과 이별, 재회를 반복한다.
스마트폰과 SNS로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요즘의 디지털식 연애가 아니다.
연락할 길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하염없이 소식을 기다리는 아날로그식 연애다.
정 감독은 "스마트폰이 없던 시기의 연애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락이 끊어지면 바로 연락할 방법이 없거나, 연락처를 모르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던 기점이 90년대 초반인 것 같아요.
영화 '애수'(1940)를 보면 남녀가 다리 위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엇갈리니까 평생 못 만나죠. 그래서 더 간절해지고 여운이 남고,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 남죠. 카톡으로 문자를 보낸 뒤 읽었다는 표시를 봤는데, 상대가 답을 안 하면 감정이 상하고, 왜 답을 안 하는지 이유는 바로 알아야겠고…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과 속도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손을 잡는데, 뽀뽀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기억하고 생각하는 그런 감정요.
"
1994년을 영화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IMF 환란을 겪은 세대를 담고 싶어서다.
88학번(한양대 연극영화학과)인 그는 "97년과 98년 IMF 당시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에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화학적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무한한 경쟁 속에서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고, 직장에서는 안정적으로 정년까지 다니지 못하고… 긴 세월 동안 당연시 여겨졌던 판이 완전히 뒤집힌 시기였죠." 영화 속 현우는 말 못 할 과거 때문에 미수에게 마음을 온전히 열지 못한다.
미수는 그런 현우가 불안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정 감독은 "상대방이 아니라 두려움, 조급함 등 각자 내면에 지닌 기질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 작품은 정해인과 김고은의 실제 연인 같은 연기 호흡으로 주목받았다.
28일 개봉을 앞두고 예매량이 7만장에 육박한 것도 두 배우의 '케미'에 대한 높은 기대감이 한몫했다.
사전 예매량만 보면 역대 멜로 영화 최고 흥행작인 '늑대소년'(2012년·707만명), '건축학개론'(2012년·411만명)을 뛰어넘는다.
정 감독은 '은교'(2012)에서 원석이던 김고은을 발굴한 데 이어 7년 만에 다시 기용했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 등을 겪는 보통의 20대 미수와 김고은의 싱크로율이 높았다"고 떠올렸다.
정해인에 대해선 "캐스팅 당시 대중에는 덜 알려졌지만, 동업자들 사이에선 '언제 포텐셜이 터지느냐' 그 시기만 남은 아주 유명한 배우였다"고 전했다.
극 중 현우는 미수에게 "나는 여러 개가 필요 없다.
진짜 좋은 거 한두 개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정 감독은 그런 대사를 하는 현우와 인간 정해인이 실제 닮았다고 했다.
이 작품에는 신승훈, 이소라, 루시드폴뿐만 아니라 콜드플레이 등의 명곡 10여곡이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로 사용됐다.
곡의 가사는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거나 서사로 사용된다.
기성곡을 사용한 만큼 음원 사용료가 웬만한 저예산 영화 제작비와 맞먹을 정도로 투입됐다.
정 감독은 "이 영화 전체에서 첫 번째 주인공은 사실 음악"이라며 "작곡한 음악이 아니라 기성곡을 이처럼 많이 사용한 작품은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영화 '기생충'을 제작한 바른손이앤에이 곽신애 대표와 부부 사이고, 곽 대표의 오빠는 곽경택 감독이다.
5~6월에는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 1천만 영화 타이틀을 거머쥔 데 이어 이달에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관객을 만나고, 9월에는 곽경택 감독의 신작 '장사리:잊혀진 영웅들'이 개봉한다.
정 감독은 "가족끼리 애틋하지만, 작품세계와 기질이 서로 너무 달라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