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화학물질 규제, 일본 수준으로 합리화해야
한·일 경제 갈등 속에서 산업계는 화학물질 규제를 부품·소재산업 활성화를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로 꼽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들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화학물질 등록 평가제도(REACH)를 벤치마킹한 이 제도는 미국, 일본보다 규제 강도가 세다. 단순히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과 경쟁하기 어려운 정도를 넘어, 지금 한국의 역량으로는 정상적인 집행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시급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일본 수준으로 기업의 부담을 낮추고 정부의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 사전 평가자료 제출 대상을 신규 화학물질로 한정하고, 기존 화학물질은 미국, 일본처럼 정부가 주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기존 화학물질이 전체 유통의 95%에 달하는 상황에서 이런 제도 개선은 기업에 큰 도움이 된다.

화학물질 평가도 자체적으로 하기보다 EU, 미국, 일본의 평가결과를 준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사용하는 거의 모든 화학물질은 선진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자체 평가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대신 가습기 살균제처럼 선진국에 없는 사례를 발굴하고 여기에 우리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환경부의 자세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환경부는 외부 비판에 반박자료를 내기에 급급하다. 기업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 6월 말 화평법 시행시기를 늦추자는 한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 환경부는 가습기 살균제 유사 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해 화평법 시행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관계가 맞지 않는 얘기다. 올해부터 가습기 살균제를 포함한 생활화학제품의 평가·관리 법률은 화평법에서 ‘화학제품안전법’으로 바뀌었다. 이제 화평법은 가습기살균제와 관계가 없다.

솔직해져야 한다. 환경부의 평가담당인력은 기간제 포함 60명 정도다.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는 EU는 자체 전담기구만 500명이다. 여기에 28개 회원국 정부의 관련 부서까지 참여한다. 물리적으로 EU와 같은 제도를 운영할 수 없다. 한국의 평가 역량이 질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EU는 수십 쪽에 달하는 평가보고서를 공개하는데, 우리는 몇 줄의 독성평가 결과가 전부다.

이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지난달 발표한 한국소비자원의 해외직구 분사형 세정제 조사결과다. 미국과 독일산 7개 제품에서 국내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가습기살균제 성분인 CMIT, MIT 성분이 검출됐다고 한다. 그런데 왜 미국, 일본, EU에서는 정상적으로 판매되는 제품이 한국에서만 금지되고 있을까. 위해성 평가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는 보건복지부의 역학조사를 통해 인과관계가 확인됐다. 하지만 환경부의 공식 위해성 평가 보고서는 없었다. 살균제 성분에 독성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얼마나 노출되는지가 중요하다. 소금도 많이 먹으면 죽는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투명한 의사결정에서 시작된다. 전문가 영역인 과학적 평가는 더욱 그렇다. 선진국에서는 수십, 수백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낸다. 이후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도 잘 정리해 공개한다. 이런 보고서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개하는 이유는 투명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환경부의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화평법에 따라 화학물질평가위원회는 의무적으로 위해성에 관한 심사·평가 등을 해야 한다. 그런데 환경부 홈페이지에서 검색되는 위원회 개최 소식은 2015년 1월 첫 회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선진국 기관은 물론 우리 식품의약품안전처와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선진국에 비해 많이 부족하고 위원회별 차이도 크지만 식약처 홈페이지에서는 적어도 언제 회의가 열렸고 무엇이 논의됐는지는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