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봉 김태원·청봉 김율 의병장 항일투쟁하다 장렬히 전사
손자 김갑제 광복회 지부장 "의병 정신과 日 불매운동 일맥상통"
"웃음 머금고 가리" 일제 맞서 죽음의 항쟁 벌인 '형제 의병장'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항일투쟁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1908년 4월 장렬히 전사한 죽봉(竹峰) 김태원(본명 김준) 의병장은 전사하기 두 달 전 친동생인 김율 의병장에게 서신을 보냈다.

당시 맹활약하던 이들 형제 의병장을 소탕하겠다며 일본군이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해 압박해오던 상황이었다.

다소 위축돼 있던 동생을 격려하려는 그의 서신에선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죽봉은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힘 한번 써보지 않고 무력하게 통째로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들 형제는 호남 지방 의병들이 모인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해 선봉장을 맡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전보를 썼다.

의병들은 구식 화승총이나 낫, 죽창 등으로 무장했다고 하지만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겐 맨몸으로 달려드는 것과 다를바 없었다.

의병 100명이 죽어야 일본군 1명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력 차이가 상당했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은 이러한 격차마저도 뛰어넘었다.

대신 의병들은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십분 활용해 일본군을 상대했다.

이런식으로 1908년엔 강력하기로 유명한 일본군 요시다 광주수비대를 격파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일본군은 이런 형제 의병장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특별부대를 만들어 3차례에 걸친 대규모 토벌에 나섰다.

결국 1908년 3월 동생인 김율이 일본군에 먼저 체포됐고, 죽봉은 한 달 뒤 일본군의 총탄에 전사했다.

워낙 신출귀몰해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죽봉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군은 체포된 동생을 데리고 왔다.

형의 시신을 확인한 김율은 의연하게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킨 뒤 그 자리에서 총살 당했다.

그렇게 일제에 항거하다 생을 마감한 두 형제 의병장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광주 농성교차로에서 광천동을 지나 운암고가 도로까지 이어지는 죽봉대로는 김태원 의병장의 호를 땄다.

형제가 순국한 뒤 그의 가족들은 핍박과 가난에 시달렸다.

죽봉의 부인은 일본군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인두로 얼굴과 가슴을 지졌고,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자결했다.

죽봉이 전사할 당시 불과 7살이었던 아들 김동술도 일본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평생을 반신불수로 지냈다.

죽봉의 딸은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숨긴 채 타 지역으로 시집을 보냈다.

김동술은 서당 훈장을 지내며 51살의 나이에 늦둥이 아들을 보고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 늦둥이 아들이 9년째 광복회 광주전남지부를 이끄는 김갑제 지부장이다.

김 지부장은 "독립운동으로 온 가족이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긍지가 없었으면 바르게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웃음 머금고 가리" 일제 맞서 죽음의 항쟁 벌인 '형제 의병장'
다만 "독립운동에 대한 핍박과 탄압으로 빚어진 경제적·교육적 격차로 인해 여전히 어려운 삶을 사는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며 사회적 배려와 보호를 강하게 역설했다.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선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일본이 여전히 우리를 식민지로 보고 있다는 것"이라고 분개했다.

이어 "이번 일을 계기로 친일 청산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놓쳐버리면 영원히 속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며 "경제 제재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견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할 때 대신 싸운 사람이 바로 의병"이라며 "총칼을 들지 않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의 의병 정신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