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기념비 제막(종합)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경내 설치…'애국의 혼 민족의 별' 새겨
안민석 "오늘 선생 부활하는 날"…소강석 "민족의 광야에 별처럼 빛나길"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일제강점기 당시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최재형 기념비가 현지에 세워졌다.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는 12일(현지시간) 오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기념관 내에서 최재형 기념비를 제막했다.
최재형기념관은 선생이 일본군에 연행돼 순국하기 전까지 산 곳이다.
현재는 해외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단장해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전시물로 탈바꿈했다.
기념비는 최재형 염원이던 대한민국 광복을 형상화한 한반도 모양 비석으로 만들어졌다.
2.5m 높이 비석에는 태극기 문양이 또렷이 새겨졌다.
비석 전면 우측으로는 '애국의 혼 민족의 별 최재형'이란 문구가 들어갔다.
비석 한쪽으로는 최재형 흉상도 함께 들어섰다.
흉상 아래로는 최재형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한글과 러시아어로 소개했다.
제막식에는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공동대표이자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고려인 동포인 이 블라디미르 우수리스크 시의원 등 100여명이 참석해 한목소리로 축하했다.
안민석 위원장은 "오늘은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선생이 부활하는 날"이라며 "오늘 일본은 또다시 경제적 침략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100년 전에는 우리가 힘이 없어 당했지만 지금 우리는 100년 전과 다르다"며 "오늘 부활하는 최재형 선생의 항일정신으로 이 경제전쟁을 이겨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강석 이사장도 "우리가 늦게나마 이런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오늘 추모 건립비,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애국 애족의 정신,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 민족의 광야에 별처럼 빛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최재형의 손자 최 발렌틴(82) 씨도 제막식에 함께했다.
그는 답사를 통해 "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가 최재형 선생에 대해 남긴 말이 있다"면서 "우리 동포에게, 같은 마을에 살던 주민에게 최재형 선생은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최재형 선생은 한국에서는 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고, 책으로도 쓰여 있고, 영화, 뮤지컬도 있다"며 최근 10년간 독립운동가로서 조부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부각했다.
제막식에 이어서는 추모 공연이 열렸다.
테너 박주옥 교수는 소 이사장이 내년 최재형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자유의 아리아'를 기념비 앞에서 노래했다.
창원국악관현악단 특별공연에 이어 최재형 장학생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닐루파르 무히디노바 양이 연주하는 동안 헌화가 진행됐다.
추모위는 최재형 순국 100주년인 내년에는 그의 후손들과 함께 순국 100주년 기념식과 추모음악회, 국제 심포지엄, 다큐멘터리·출판 기념회, 사진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최재형은 1920년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하기까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동포들에게 따뜻한 지원을 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생전 그에게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라는 애칭이 따라다닌 이유다.
그는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일이 85년 뒤 조국 광복의 날이 됐다.
최재형은 당시 한인들이 연해주로 집단 이주할 때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갔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출 뒤에는 항구에서 지쳐 쓰러진 상태로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구조된 뒤 6년간 러시아 상선을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후 군납사업을 하며 부를 쌓았고, 이렇게 번 돈을 항일 독립운동과 동포 지원에 사용했다.
그가 생전 연해주에 세운 학교가 30개에 달할 정도로 한인 동포 후손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1919년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초대 재무 총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이듬해 4월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했다.
그해 5월 임시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열렸다.
그의 시신은 아직 찾지 못했고, 묘지도 없다.
정부는 순국 42년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연합뉴스
안민석 "오늘 선생 부활하는 날"…소강석 "민족의 광야에 별처럼 빛나길"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는 12일(현지시간) 오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기념관 내에서 최재형 기념비를 제막했다.
최재형기념관은 선생이 일본군에 연행돼 순국하기 전까지 산 곳이다.
현재는 해외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단장해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전시물로 탈바꿈했다.
기념비는 최재형 염원이던 대한민국 광복을 형상화한 한반도 모양 비석으로 만들어졌다.
2.5m 높이 비석에는 태극기 문양이 또렷이 새겨졌다.
비석 전면 우측으로는 '애국의 혼 민족의 별 최재형'이란 문구가 들어갔다.
비석 한쪽으로는 최재형 흉상도 함께 들어섰다.
흉상 아래로는 최재형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한글과 러시아어로 소개했다.
제막식에는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공동대표이자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고려인 동포인 이 블라디미르 우수리스크 시의원 등 100여명이 참석해 한목소리로 축하했다.
안민석 위원장은 "오늘은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선생이 부활하는 날"이라며 "오늘 일본은 또다시 경제적 침략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100년 전에는 우리가 힘이 없어 당했지만 지금 우리는 100년 전과 다르다"며 "오늘 부활하는 최재형 선생의 항일정신으로 이 경제전쟁을 이겨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강석 이사장도 "우리가 늦게나마 이런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오늘 추모 건립비,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애국 애족의 정신,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 민족의 광야에 별처럼 빛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그는 답사를 통해 "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가 최재형 선생에 대해 남긴 말이 있다"면서 "우리 동포에게, 같은 마을에 살던 주민에게 최재형 선생은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최재형 선생은 한국에서는 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고, 책으로도 쓰여 있고, 영화, 뮤지컬도 있다"며 최근 10년간 독립운동가로서 조부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부각했다.
제막식에 이어서는 추모 공연이 열렸다.
테너 박주옥 교수는 소 이사장이 내년 최재형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자유의 아리아'를 기념비 앞에서 노래했다.
창원국악관현악단 특별공연에 이어 최재형 장학생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닐루파르 무히디노바 양이 연주하는 동안 헌화가 진행됐다.
추모위는 최재형 순국 100주년인 내년에는 그의 후손들과 함께 순국 100주년 기념식과 추모음악회, 국제 심포지엄, 다큐멘터리·출판 기념회, 사진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최재형은 1920년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하기까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동포들에게 따뜻한 지원을 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생전 그에게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라는 애칭이 따라다닌 이유다.

그의 생일이 85년 뒤 조국 광복의 날이 됐다.
최재형은 당시 한인들이 연해주로 집단 이주할 때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갔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출 뒤에는 항구에서 지쳐 쓰러진 상태로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구조된 뒤 6년간 러시아 상선을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후 군납사업을 하며 부를 쌓았고, 이렇게 번 돈을 항일 독립운동과 동포 지원에 사용했다.
그가 생전 연해주에 세운 학교가 30개에 달할 정도로 한인 동포 후손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1919년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초대 재무 총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이듬해 4월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했다.
그해 5월 임시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열렸다.
그의 시신은 아직 찾지 못했고, 묘지도 없다.
정부는 순국 42년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