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무릎까지…과거사 반성으로 주변국과 정상화뒤 동서 교류·협력 추진
서방국가와 관계 다진 뒤 동유럽 국가에 접근
슐레지엔의 폴란드 영토 인정 조약에 '서서갈등'…여론은 조약 찬성
여전히 "방심하면 안돼…역사적 교훈 잊지말아야 한다"는 獨
[서독의 기억]⑮ 격 다른 과거사 반성…안팎 갈등 넘은 정상국가의 '클라스'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터져 나왔다'서독의 기억'을 꺼내 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다섯번 째 시리즈로, 신동방정책 추진과정에서의 '과거사 반성'과 내부 갈등을 다룹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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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현대사에서 한반도, 일본과 각각 공통분모가 있다.

동서독 분단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휴전선에 긴장이 감도는 한반도와 유사하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같다.

물론 독일은 한반도와 달리 통일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옛 서독은 내부 갈등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꾸준히 확대했다.

독일이 전후 일본과 다른 점은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함께 실효적인 조치를 이어간다는 데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요소는 동서독 분단 당시 서독의 과거사 반성과 통일을 위한 '작은 발걸음'이 결부돼 있다는 점이다.

서독은 주변국과 얽힌 과거사를 해결하고 이에 따른 '서서 갈등'을 해소하면서 동독과의 '접근을 통한 변화'를 시작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5년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와 관련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메르켈 총리는 강연에서 '일본이 역사 문제를 둘러싼 중국, 한국과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전범국인 독일이 주변국과의 화해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면서 "독일은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독일 총리 입장에서 당신들(일본)에게 당신들 이웃에 어떻게 대처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어렵다"면서도 "그러나 역사와 경험은 우리에게 평화로운 화해의 수단을 찾을 것을 일러준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서독의 기억]⑮ 격 다른 과거사 반성…안팎 갈등 넘은 정상국가의 '클라스'
◇ 보수정권, '과거사 반성' 통해 佛과 정상화…서방세계 일원 도약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에 분할 점령됐다.

1949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연합국 점령지역에는 서독 정부가, 소련군 점령지역에는 동독 정부가 각각 세워졌다.

이후 서독은 친서방정책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초석을 닦았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과거의 만행을 사죄해 전쟁 당시 연합국의 마음을 계속 풀어나갔다.

특히 서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했고, 과거 잦은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의 관계 증진에 힘을 썼다.

서독이 한국전쟁과 소련의 팽창정책으로 위협을 느끼던 1950년대 초 미국과 협의해 재무장을 추진하자, 프랑스는 강력히 반대했다.

이에 서독은 프랑스를 설득해나갔고 결국 1954년 10월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간에 서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재무장을 가능하게 한 파리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은 1963년에는 프랑스와 별도로 국방·경제·문화·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협력의 시대를 여는 엘리제 조약을 체결하며 과거사의 꼬인 매듭을 계속 풀어나갔다.

1958년부터 1962년 중반까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10번 이상 만나고 40통 이상의 서신을 교환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소련으로부터 안보를 지키기 위해 서방체제에 편입되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 속에서 이런 외교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면서 서독 정부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서독이 독일을 대표하는 합법국가라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통일정책의 근간으로 밀고 나갔다.

과거사에 대한 꾸준하고 명확한 반성 속에서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친서방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거듭난 셈이다.

[서독의 기억]⑮ 격 다른 과거사 반성…안팎 갈등 넘은 정상국가의 '클라스'
◇ 진보정권, 동유럽과 정상화로 신동방정책 탄력…실향민 등 보수 반발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당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한참 고개를 숙였다가 털썩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브란트의 핵심 참모진마저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만행에 온몸으로 사죄한 것이다.

이 장면은 전 세계로 타전됐다.

지금까지도 과거사 반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독일에 대한 폴란드 시민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다소간이라도 녹인 것은 물론이다.

1969년 취임한 사회민주당 소속의 브란트 총리는 신동방정책을 내세웠다.

동독의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동독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결국 서독은 1970년 8월 소련과 관계 정상화와 불가침을 골자로 한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폴란드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했다.

바르샤바에서의 참회는 바르샤바 조약 체결 직전 이뤄졌다.

이 두 조약에서는 오데르-나이세강 동부지역인 슐레지엔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제국에 속했던 영토였다가 소련이 전후 폴란드의 일부 영토를 가져가는 대신 폴란드로 넘긴 땅이다.

이에 서독 내부에서 보수 세력을 위주로 반발이 컸다.

전쟁 후 보따리를 짊어지고 고향 땅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탈동독민들도 반길 수 없는 결정이었다.

당시 독일 주류 정치권과 지식인들이 참여한 통일 단체인 '독일분할반대위원회'는 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까지 독일 영토로 보고 있었다.

이 단체가 1950∼1960년대에 1937년 당시의 독일 국경 수복을 목표로 한 포스터를 붙였다.

그만큼, 영토 수복에 대한 의지가 사회 일각에 강하게 남아있었던 셈이다.

독일분할반대위원회에는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 자유민주당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했고, 사회민주당 정치인들도 포함돼 있을 정도였다.

이 단체의 이름은 서독의 초대 대통령인 테오도어 호이스가 짓기도 했다.

모스크바·바르샤바 조약의 체결 전후 정치권에서는 제1야당인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이 강력히 반발했다.

모스크바 조약에서 동독을 사실상 인정한 점에 대한 반발이 가장 컸으나, 영토 문제 역시 강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연합뉴스가 찾아본 안드레아스 그라우의 저서 '시류를 역행하여'에서는, 기독민주당의 라이너 바르첼 대표가 1971년 1월 연방하원 연설을 통해 소련 및 폴란드와의 협상에서 전후 국경을 완전히 정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며 비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서독의 기억]⑮ 격 다른 과거사 반성…안팎 갈등 넘은 정상국가의 '클라스'
◇ 서독 국민의 동구권 조약 지지로 갈등 극복
연합뉴스가 당시 여론조사 자료를 살펴본 결과, 서독 국민은 바르샤바 참회의 배경이 된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에 지지를 보냈다.

당시 여론조사기관 알렌스바흐가 1972년 3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연방의회가 모스크바, 바르샤바 조약을 승인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48%가 찬성했다.

반대는 27%에 불과했다.

특히 알렌스바흐가 같은 해 3∼4월 실시한 조사에서 '일반적으로 동구권 조약에 찬성인가'는 질문에 57%가 찬성한다고 답했고, 반대는 15%에 불과했다.

알렌스바흐가 같은 해 두 조약의 효력이 발효된 후인 6∼7월 조사에서 조약 효력에 대해 '환영한다'는 답변은 62%에 달했다.

두 조약 체결에 앞서 서독 정부는 신동방정책에 따른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반대진영을 상대로 설득 작업을 벌였다.

브란트 총리는 1970년 4월 브란트 총리가 탈동독민 단체 지도부와 90분간 면담을 하기도 했다.

[서독의 기억]⑮ 격 다른 과거사 반성…안팎 갈등 넘은 정상국가의 '클라스'
◇ "과거사 기억 이어가야" 한다는 獨
독일이 과거사를 기회가 될 때마다 반성하고, 극우주의와 반(反)유대주의에 맞서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계속 취하는 것은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독일이 잠시라도 과거를 잊으면 주변국과 쌓아온 공든 탑은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주변국은 전범국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총리는 브란트 총리와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고 말하며 통곡했다.

올해도 독일에서 부끄러운 과거사를 계속 기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달 20일 75년 전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식에 참석해 "우리가 방심해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고 이어가야 한다.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이렇게 끊임없이 주변국가와의 정상화 과정을 거치면서 내부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유럽 내에서도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진 박사는 "일본은 과거의 반성 속에 이웃 국가와 공동의 가치를 모색하는 '정상 국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의 '보통 국가'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는 바로 오늘 국제사회에서 일본과 독일의 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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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