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교향악단 안정 이끈 요엘 레비…"한국과 인연 영원할 것"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극심한 갈등 잠재우고 오케스트라 위상 회복…12월 임기 만료
26일 정기연주회서 클래식계 블록버스터 '구레의 노래' 지휘
"흩어진 1천개 퍼즐을 맞출 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조각이 있을까요?"
우문현답이었다.
수년간 극심한 갈등을 겪은 KBS교향악단을 어떻게 안정시켰냐는 질문에 백발의 지휘자는 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 요엘 레비(69)를 최근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본관에서 만났다.
오는 12월 임기 만료를 앞둔 그는 작별이 성큼 다가온 것이 못내 마음 아픈 듯 "끝이 아니다"라고 거듭 밝혔다.
◇ "관객 사랑 얻는 게 급선무였다"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계 지휘자 레비는 2014년 1월 KBS교향악단 새 사령탑에 앉았다.
KBS에서 2012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KBS교향악단이 단원과 함신익 전 상임지휘자 간 갈등으로 깊은 슬럼프를 겪던 시기였다.
브장송 국제 젊은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음악계에 데뷔한 그는 미국 애틀랜타 심포니, 벨기에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일 드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 등을 이끈 명장이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매우 힘든 상황이었어요.
관객과 평론가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죠.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바꿀 순 없었지만, 저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관객의 사랑과 신뢰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습니다.
"
레비는 팔을 걷어붙이고 오케스트라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좋은 연주자를 발탁하고, 대부분 정기연주회를 직접 지휘했으며,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해 단원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지난해 5월 KBS교향악단은 말러 교향곡 제9번 연주로 객석과 평단의 상찬을 받았는데, 시카고 심포니가 '우리가 들은 것 중 가장 좋았다'는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이 연주회 실황은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 레이블인 도이체 그라모폰(DG) 음반 발매로도 이어졌다.
KBS교향악단 창단 62년 만의 DG 데뷔였다.
그는 단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저는 '가르쳤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단원들은 프로니까요.
저는 방향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
◇ "쌓아 올린 신뢰, 2분 만에 무너질 수도"
KBS교향악단은 레비와 두 차례 계약 연장을 통해 총 6년을 함께했다.
그사이 익힌 한국어도 많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잠깐만요', '계속계속'이라고 말하며 "제가 한국어를 쓰면 단원들이 함박웃음을 지어서 참 좋다"고 했다.
"제 미션은 완수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올라왔습니다.
관객이 돌아왔고, 유럽 투어도 세 차례나 펼쳤죠. 임기 동안 이런 모든 것들이 이뤄져서 정말 뿌듯합니다.
솔직히 제가 떠나고 난 뒤 모습이 걱정되긴 해요.
관객의 신뢰는 2분 만에 무너질 수도 있거든요.
"
후임자에게 건넬 조언이 있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레 말을 아꼈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단원들을 믿어줬으면 해요.
KBS교향악단은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성과를 냅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갈지 한계가 없다는 게 강점입니다.
브람스, 베토벤, 말러, 스트라빈스키 그 누구를 연주해도 유연하고 탁월하게 변신합니다.
KBS교향악단이나 후임자가 제 조언을 원한다면 언제든 기쁘게 응할 겁니다.
"
칠순을 앞둔 명장은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KBS교향악단을 이끄는 동안 북녘에서 연주할 기회가 없었던 것을 꼽았다.
그는 "주빈 메타가 제게 꼭 북한에 가보라고 신신당부했고, 고(故) 로린 마젤도 생전에 '나도 북한에 다녀왔잖아, 노력해봐'라고 했다"며 "북한에서 연주회를 여는 건 음악하는 많은 사람의 꿈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2∼3년 전 북측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는데 불행히도 여러 정세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남북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가깝게 하는 데 음악이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한민족이잖아요.
제가 언젠가 그 특별한 콘서트의 지휘를 맡는다면 큰 영광일 겁니다.
"
◇ "이번에도 악보 외우냐고요? 공연장서 직접 확인하길"
레비는 모든 무대를 암보(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것)해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정기연주회는 그래서 관심을 끈다.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를 올리기 때문이다.
연주가 어려운 데다 말러의 '천인 교향곡'과 비견될 정도로 규모가 크기 때문에 국내에선 2004년 통영 국제음악당 개관 작품으로 초연된 이래 15년 만에 연주된다.
이번에도 암보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레비는 "콘서트에 올 예정인가요? 그때 확인하면 어떨까요"라며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일화도 소개했다.
오래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지휘했는데, 연주자들이 레비가 암보하는지 여부를 놓고 돈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스무살 때 스승께서 '악보를 확인하려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음악이 머리 위로 다 지나가 버린다'고 하셨다.
평생 잊지 않는 가르침"이라며 "그 이후로 악보를 외웠을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없다"고 간명하게 말했다.
"대작을 연주하려면 그걸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음악뿐 아니라 무엇이든 높은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
그는 '구레의 노래'의 아름다움에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중세 덴마크 왕과 아름다운 여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120분간 표현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인생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작품입니다.
어느 작곡가와 비교해도 이만큼 낭만적인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청중에게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할 겁니다.
"
인터뷰를 매듭지을 무렵, 레비에게 KBS교향악단에서의 마지막 날 무엇이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끝이란 없다"고 했다.
"한국을 정말 사랑해요.
어떻게든 이곳에 다시 돌아올 일을 만들겠죠. 그리고… 삶을 즐기려고 할 거예요.
늘 바쁘게 사느라 시간이 없었거든요.
키우던 강아지가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강아지를 기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연주를 이어나가겠죠?"
/연합뉴스
26일 정기연주회서 클래식계 블록버스터 '구레의 노래' 지휘

우문현답이었다.
수년간 극심한 갈등을 겪은 KBS교향악단을 어떻게 안정시켰냐는 질문에 백발의 지휘자는 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 요엘 레비(69)를 최근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본관에서 만났다.
오는 12월 임기 만료를 앞둔 그는 작별이 성큼 다가온 것이 못내 마음 아픈 듯 "끝이 아니다"라고 거듭 밝혔다.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계 지휘자 레비는 2014년 1월 KBS교향악단 새 사령탑에 앉았다.
KBS에서 2012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KBS교향악단이 단원과 함신익 전 상임지휘자 간 갈등으로 깊은 슬럼프를 겪던 시기였다.
브장송 국제 젊은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음악계에 데뷔한 그는 미국 애틀랜타 심포니, 벨기에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일 드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 등을 이끈 명장이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매우 힘든 상황이었어요.
관객과 평론가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죠.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바꿀 순 없었지만, 저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관객의 사랑과 신뢰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습니다.
"
레비는 팔을 걷어붙이고 오케스트라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좋은 연주자를 발탁하고, 대부분 정기연주회를 직접 지휘했으며,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해 단원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지난해 5월 KBS교향악단은 말러 교향곡 제9번 연주로 객석과 평단의 상찬을 받았는데, 시카고 심포니가 '우리가 들은 것 중 가장 좋았다'는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이 연주회 실황은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 레이블인 도이체 그라모폰(DG) 음반 발매로도 이어졌다.
KBS교향악단 창단 62년 만의 DG 데뷔였다.
그는 단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저는 '가르쳤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단원들은 프로니까요.
저는 방향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

KBS교향악단은 레비와 두 차례 계약 연장을 통해 총 6년을 함께했다.
그사이 익힌 한국어도 많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잠깐만요', '계속계속'이라고 말하며 "제가 한국어를 쓰면 단원들이 함박웃음을 지어서 참 좋다"고 했다.
"제 미션은 완수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올라왔습니다.
관객이 돌아왔고, 유럽 투어도 세 차례나 펼쳤죠. 임기 동안 이런 모든 것들이 이뤄져서 정말 뿌듯합니다.
솔직히 제가 떠나고 난 뒤 모습이 걱정되긴 해요.
관객의 신뢰는 2분 만에 무너질 수도 있거든요.
"
후임자에게 건넬 조언이 있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레 말을 아꼈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단원들을 믿어줬으면 해요.
KBS교향악단은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성과를 냅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갈지 한계가 없다는 게 강점입니다.
브람스, 베토벤, 말러, 스트라빈스키 그 누구를 연주해도 유연하고 탁월하게 변신합니다.
KBS교향악단이나 후임자가 제 조언을 원한다면 언제든 기쁘게 응할 겁니다.
"
칠순을 앞둔 명장은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KBS교향악단을 이끄는 동안 북녘에서 연주할 기회가 없었던 것을 꼽았다.
그는 "주빈 메타가 제게 꼭 북한에 가보라고 신신당부했고, 고(故) 로린 마젤도 생전에 '나도 북한에 다녀왔잖아, 노력해봐'라고 했다"며 "북한에서 연주회를 여는 건 음악하는 많은 사람의 꿈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2∼3년 전 북측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는데 불행히도 여러 정세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남북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가깝게 하는 데 음악이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한민족이잖아요.
제가 언젠가 그 특별한 콘서트의 지휘를 맡는다면 큰 영광일 겁니다.
"

레비는 모든 무대를 암보(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것)해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정기연주회는 그래서 관심을 끈다.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를 올리기 때문이다.
연주가 어려운 데다 말러의 '천인 교향곡'과 비견될 정도로 규모가 크기 때문에 국내에선 2004년 통영 국제음악당 개관 작품으로 초연된 이래 15년 만에 연주된다.
이번에도 암보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레비는 "콘서트에 올 예정인가요? 그때 확인하면 어떨까요"라며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일화도 소개했다.
오래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지휘했는데, 연주자들이 레비가 암보하는지 여부를 놓고 돈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스무살 때 스승께서 '악보를 확인하려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음악이 머리 위로 다 지나가 버린다'고 하셨다.
평생 잊지 않는 가르침"이라며 "그 이후로 악보를 외웠을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없다"고 간명하게 말했다.
"대작을 연주하려면 그걸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음악뿐 아니라 무엇이든 높은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
그는 '구레의 노래'의 아름다움에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중세 덴마크 왕과 아름다운 여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120분간 표현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인생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작품입니다.
어느 작곡가와 비교해도 이만큼 낭만적인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청중에게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할 겁니다.
"
인터뷰를 매듭지을 무렵, 레비에게 KBS교향악단에서의 마지막 날 무엇이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끝이란 없다"고 했다.
"한국을 정말 사랑해요.
어떻게든 이곳에 다시 돌아올 일을 만들겠죠. 그리고… 삶을 즐기려고 할 거예요.
늘 바쁘게 사느라 시간이 없었거든요.
키우던 강아지가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강아지를 기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연주를 이어나가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