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담보로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한 전직 외교부 장관의 쓴소리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했다. 또 다른 전직 외교부 장관은 “정치가 외교의 자리를 불살랐다”고 비판했다.

윤영관, 송민순, 유명환, 김성환 장관 등 4명의 전직 외교부 수장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갈수록 전면전으로 치닫는 한·일 갈등을 풀 수 있는 해법을 묻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공식 인용은 거부했다. 익명으로만 답하겠다고 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정치가 하는 일에 연루되기 싫다”고 했고, “공부가 안 돼 있다”며 발을 빼기도 했다. 반일 정서가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입바른 소리를 했다간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우려가 그들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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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장관들이 공통적으로 우려한 바는 ‘외교의 실종’이다. A 장관은 “국제사회는 힘의 관계로 이뤄져 있다”며 “상대국가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면 그 나라와 최대한 가까워야한다”고 했다. 개인들끼리의 ‘사귐’이 나라들 간에는 외교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청와대는 일본과 아베 총리를 ‘나쁘다’라는 인식으로 보고 있다는 게 A장관의 지적이다.

최근에도 일본을 여러차례 왕래하고 있다는 B 장관은 “작년부터 일본에서 다양한 경로로 우리 정부와 외교를 시도했는데 우리 정부가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일본 내 여론을 전하면서 “한국이 일본을 무시한다는 정서가 넓게 퍼져 있다”며 “한·일 갈등과 관련해서도 양국이 느끼는 심각성의 강도가 너무 다르다”고 했다.

B 장관은 일례로 금융시장에 대한 영향을 꼽았다. “뉴욕, 런던, 싱가포르 등 해외 주요 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신용도는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크게 좌우된다”고 지적했다. 1998년 외환위기 때와 같은 일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다. 당시 일본 자금의 차입에 주로 의존하던 우리 금융시장은 일본 은행이 대출 만기 연장과 통화 스와프 등을 거부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전직 외교장관들은 청와대의 잘못된 현실인식과 관련해 문 대통령의 15일 수보회의 발언을 꼽았다. 그 날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일본 경제가 더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한 장관은 “10만t 배와 3만t 배가 부딪히면 어떤 게 가라앉겠냐”는 것이다. ‘12척의 배’로도 이길 걸 고민할 게 아니라 12척만 남는 상황을 피해야한다는 지적이다. 장관들은 “다른 10만t 배를 끌어와 일본에 대항할 연합군을 만드는 걸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장관들은 정부가 국민을 볼모로 전쟁에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전직 장관은 과거 천안함 폭침 등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북한과 충돌이 자주 일어날 때의 사례를 들었다. 그는 “당시 정부는 국민을 안심시킨다며 연일 서해를 사수(死守)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때 이렇게 지적했다.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자식같은 장병들의 죽음을 담보로 지키는 게 해결책이냐고 따졌다”고 말했다.

미국의 중재 가능성에 대해 전직 장관들은 “이미 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중국의 위협이나 북한의 공세 등 동북아시아 안보에 직접적인 위험이 발생했을 때에나 한·미·일 협력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한 전직 장관은 “아니길 바라지만, 혹여나 현 정부가 내년 4월 총선 승리를 위해서 한·일 갈등을 활용하는 것 아닌 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