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요즘 일흔살은 노인네 모임 가면 물심부름 하는 나이"라며 "일흔살을 희귀한 수명이란 뜻의 '희수'(稀壽)라고도 하는데, 너무 흔해져 그 나이에 대한 존경을 잃어버린 채 산다"고 꼬집었다.
들국화 최성원이 듣고서 "형, 이거 타이틀이야"라고 꼽은 노래도 있다.
신나는 리듬의 '돈 좀 주라'이다.
'매누리야 내게 돈 좀 주라…문만 열면 돈이 필요하다'. 그는 11곡 녹음을 위해 마포구 공덕동 사무실에 500만 원짜리 중고 이동식 녹음 부스를 들였다.
한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다.
영감이 떠오를 때, 가장 편안한 소리를 찾는 순간에 바로 녹음하고 싶어서였다.
"천번쯤 들락날락했을 거예요.
허허." ◇ "CM 송 3천곡 중 '사랑해요 LG' 기억남아"·"라디오 진행하며 창작 열망이" 어린 김도향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집 인근 극장 우미관 직원이 예뻐해 하루 3편씩 영화를 보여줬다.
'백치 아다다'부터 '19금' 영화까지 중학교 시절에만 1천편가량을 훑었다.
주제가는 외우려 하지 않아도 쏙쏙 머리에 박혔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영화판에 조감독으로 들어갔지만 늘 배가 고팠다.
어머니도 모셔야 했다.
이때부터 카바레 등지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월급 5만원씩 여섯 군데를 뛰니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택시비가 20~30원 할 때다.
1969년, 그는 일하던 무대에서 이미자를 만났다.
등장과 함께 최고 가수였던 이미자는 그의 뒤 타임을 장식했다.
"이미자 선배가 흑인 음악을 부르며 애드리브를 많이 넣는 저를 보고 '노래가 까분다'고 말했죠. 하하." 이미자는 지금의 남편이 과거 연출한 KBS 프로그램에 김도향을 출연시켜줬다.
아는 팝송이 1천곡이 되다 보니 그는 매주 2곡씩 불렀다.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소문나자 다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TV에서 얼굴이 알려질 즈음, 그는 군대 동기인 손창철과 투 코리언스를 결성해 1970년 9월 1일 데뷔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등을 내며 인기를 끌던 팀은 1974년 해체했다.
급기야 그는 대마초 파동에도 휘말렸다.
당연히 설 무대는 없었고, 먹고 살려고 시작한 것이 CM 송 작업이었다.
투 코리언스 시절 오리온제과 '줄줄이 사탕' CM 송이 히트한 덕에 제안이 쏟아졌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바',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중략) 아카시아 껌', '우리집 강아지 뽀삐, 우리집 화장지 뽀삐',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LG'…. 창작한 3천여 곡 중 그는 1994년 사랑을 테마로 만든 LG그룹 광고를 손에 꼽았다.
"한창 산에 다닐 때인데, 요청이 왔어요.
산에서 내려와 회의하면서 그 자리에서 만들었죠.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며 살기를, 또 (그룹명을 바꾸기 직전인) 럭키금성이 성장한 건 국민 사랑 덕이란 의미를 담았죠." 몇분 만에 순간 집중력으로 완성하다 보니, 하루에 CM 송 수십곡을 만들 때도 있었다.
화곡동 집이 80만원 하던 시절 CM 송 곡비는 50만원. 그는 이때 번 돈으로 충무로에 3층짜리 건물을 샀다.
회사를 만들어 50명의 직원도 거느렸다.
그러나 쉼 없는 생활 속에 회의가 찾아왔다.
그때 만든 노래가 대표곡 '바보처럼 살았군요'다.
이후 그는 전국의 산을 다니며 명상을 시작했다.
수련에 전념하다 보니 사람 몸 안에서 기의 움직임이 보였다고 한다.
마음을 치유하는 명상음악을 꼭 해야 했다.
그는 1990년까지 태교 음반, 수험생을 위한 음반 등 명상음악을 제작했다.
CM 송으로 번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파형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일본 유명 엔지니어 9명을 불러 작업했죠. 스튜디오도 따로 만들었고요.
자연 음향도 채집하러 다녔어요.
1990년까지 총 60장을 만들고 나니 기의 움직임이 안 보였어요.
하나님 뜻인지 마음도 그리 안 갔죠." 원래 가톨릭 신자인 그는 4년째 가톨릭평화방송(cpbc) 라디오 '김도향의 명동연가'를 진행하고 있다.
매일 저녁 2시간씩 음악을 들으며 "창작의 열망이 꿈틀댔다"고 떠올렸다.
그는 50년 이력을 새 앨범에 끄집어내고 나니 "다시 속이 깨끗해졌다"며 '껄껄' 웃었다.
이제 앨범은 내지 않더라도 순간의 생각을 꾸준히 음악으로 들려줄 계획이다.
그 힘을 믿어서다.
그는 음악을 '음식'에 빗댔다.
"마음을 넣어 부른 노래는 굉장한 음식이죠. 청각에 작용해 노래하는 이의 마음 파장까지 전달되니까요.
언젠가 제주도 치매노인 요양원 공연 때였죠. 10년간 말을 못 하던 할머니가 제 노래를 듣다가 '김도향이다'라고 말해 눈물바다가 됐어요.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방탄소년단(BTS) 제이홉의 콘서트장을 찾아 축하 인사를 건넸다.방 의장은 2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제이홉 진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멋진 공연! 정말 감동이다"라고 썼다.최근 다이어트에 성공한 모습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했던 방 의장은 홀쭉한 얼굴과 날씬해진 모습을 자랑했다. 제이홉은 이날 첫 솔로 월드투어 무대를 무사히 마쳤다.제이홉은 이날 서울 송파구 KSPO DOME(구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홉 온 더 스테이지 인 서울(HOPE ON THE STAGE in SEOUL)'을 개최했다.이날 콘서트는 지난 2월 28일, 3월 1일에 이은 3회차 공연으로, 소속사 빅히트뮤직에 따르면 제이홉은 총 사흘간 3만7500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2013년 방탄소년단으로 데뷔한 후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를 휩쓸고, K팝 가수 최초로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 입성하는 등 숱한 '최초'의 기록을 쓴 제이홉은 지난해 10월 군 복무를 마치고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홉 온 더 스테이지'는 그가 데뷔 12년 만에 처음 여는 솔로 월드투어였다.제이홉이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앞두고 공개한 곡은 글로벌 차트 점령에도 나섰다.제이홉이 피처링 한 돈 톨리버(Don Toliver)의 신곡 ‘LV Bag (feat. j-hope of BTS & Pharrell Williams)’이 지난달 28일(이하 현지시간) 발표된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에 93위로 진입했다.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가 제작하고, 그의 제안으로 제이홉과 돈 톨리버가 합류한 이 곡은 ‘싱글 다운로드’(5위)와 ‘싱글 세일즈’(7위) 10위권에 등장하며 제이홉의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 또한 이 곡은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의 ‘위클리 톱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해 온 멕시코 출신의 테너 라몬 바르가스(65)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바르가스는 이미 국내에 체류 중이며, 오는 4일부터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예정이다.서울대 성악과 관계자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바르가스 교수의 임용을 통해 세계 정상급 무대에서 쌓은 경험을 한국 성악 교육에 전수할 수 있게 됐다. 이는 국내 학생들이 세계 오페라 하우스에서 요구하는 스타일을 일찍부터 익힐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라몬 바르가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밀라노 라 스칼라, 빈 국립 오페라 등 세계 유수의 오페라 무대에서 30년 넘게 활동하며 리릭 테너로서 명성을 쌓아왔다. 그는 도니제티,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오페라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다수의 음반 작업과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해 성악 교육자로서의 경력도 꾸준히 쌓아왔다.그는 지난해까지 독일 본 극장에서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극장에서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 등 오페라 무대와 여러 콘서트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하지만 현재까지 발표된 올해 예정 공연이 5월 독일 본 극장에서의 오페라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과 6월 21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리는 콘서트 두개 뿐인것으로 보아 서울대 성악과 교수로서 맞는 첫 학기에 연주 활동보다 한국의 후학 양성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성악과가 2023년 세르비아 출신의 독일인 테너 조란 토도로비치, 불가리아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베셀리나 카사로바를 교수로 임용한 데 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사진)은 평생에 걸쳐 남긴 두 편의 걸작으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작가다. 해적과 숨겨진 보물을 둘러싼 모험 이야기를 그린 <보물섬>(1883), ‘지금 이 순간’이라는 삽입곡으로 유명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원작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건>(1886)이 그의 대표작이다.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그는 글을 쓰며 요양하기 위해 유럽, 태평양 섬 등 각지를 돌아다녔다. 1876년에는 프랑스에서 11살 연상 미국인 오즈번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880년 오즈번과 결혼한 스티븐슨은 그녀의 아들 로이드와 함께 보물섬 지도를 만들며 놀다가 영감을 얻은 뒤 <보물섬>을 출간해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한쪽 다리를 잃고 어깨에는 앵무새를 얹고 다니는 해적 이미지가 이때 처음 그려졌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건>은 인간 내면을 깊이 탐구한 작품으로 후대 문학과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티븐슨은 미국으로 떠났다가 이후 남태평양 섬나라 사모아에 정착했다. 이곳에 묻힌 그를 두고 현지인들은 ‘이야기꾼’(tusitala)이라며 존경을 표했다.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