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4일부터 한국의 주력 수출 제품인 반도체·스마트폰·TV에 쓰이는 자국산 부품의 수출규제에 나서기로 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다시 한일 분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의 조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향후 WTO 제소를 비롯해 필요한 대응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WTO 분쟁 시 일본의 대응 논리 마련에 이용될 가능성 때문에 정부는 구체적으로 일본이 어떤 조항을 위배했는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수량제한의 금지를 명시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1994) 제11조가 준용될 가능성이 높다.
GATT 제11조는 수입·수출에서 수량 제한 시 시장의 가격 기능이 정지되고, 관세보다 쉽게 무역 제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수량 제한을 금지하고 있다.
일본은 TV와 스마트폰 액정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부품인 리지스트와 고순도불화 수소(에칭 가스) 등 3가지 품목을 '포괄적 수출허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개별 수출허가 대상으로 변경할 예정이다.
일본 기업이 한국에 이 품목들을 수출하려면 계약마다 허가를 받아야 하므로 수량 제한에 해당할 여지가 크다.
일본은 1963년 수량제한의 금지 의무를 이행하는 GATT 11조국이 됐는데, 56년 만에 한국의 징용 판결을 이유로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는 셈이 됐다.
한국이 GATT 제11조를 근거로 일본이 WTO 회원국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면 일본은 안보 논리를 앞세워 반박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우방국 범주인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기 위한 법령 개정에 나섰다.
일본은 '국제적 평화 및 안전의 유지'를 위해 한국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대한 허가의 특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TO 규범에 국가안보를 이유로 교역을 제재할 수 있다는 조항은 있지만, 실제 이 규정이 분쟁에서 적용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철강·알루미늄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사문화됐던 이 조항이 보호무역의 분위기 속에 살아나고 있다.
올해 4월 WTO는 러시아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화물 경유를 막은 조처에 대해 러시아의 손을 들어준 사례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WTO 분쟁을 벌이게 되면 각각 수량 제한 금지와 국가안보라는 커다란 그림 위에 세부 규범들을 놓고 다투게 될 전망이다.
반면 WTO 분쟁이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1심 격인 분쟁해결기구(DSB) 패널 판정에만 최소 6개월이 걸리는 데다 최종심 격인 상소기구는 올해 12월이면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다.
미국이 7명으로 구성된 상소기구의 신임 위원 선출을 보이콧하면서 올해 12월이면 임기가 남은 상소기구 위원은 1명만 있는 상황이 된다.
상소기구는 3명의 위원이 한 사건을 심리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최악의 경우 1심에서 이겨도, 상소기구의 최종 판정은 받지 못하고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가 계속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