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리스크 관리 배운 셈
현지화된 국제은행으로 키울 것"
취임 5년차를 맞은 박종복 SC제일은행장(64·사진) 얘기다. 그는 영어가 유창하지 못해 본사와 회의할 때 통역을 쓰는 몇 안 되는 외국계 기업 최고경영자(CEO)다. 하지만 ‘영어 쓰는’ 어지간한 CEO보다 실적은 더 우수하다. 국내 시장에서 내리막길을 걷던 한국SC은행(현 SC제일은행)을 상승세로 다시 돌려놓은 주역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우리밀국시’는 박 행장이 주말마다 찾는 국수집이다. 미술 작가가 꿈이던 아내와 인근 갤러리를 함께 둘러본 뒤 이곳에서 안동국시 한 그릇을 먹는 게 단골 데이트 코스다. 어느새 15년째다. 그가 이 집 국수를 좋아하는 것도 육수를 여느 곳보다 깊게 잘 우려내서다. 멋은 없지만 ‘본질’에서 나오는 깊이가 있다. ‘집밥’처럼 편안한 음식을 받아든 박 행장은 지난 40년의 은행원 생활을 하나씩 진솔하게 풀어나갔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장사의 본질’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박 행장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충청도 출신인 아버지는 문인들과 교류하며 선비처럼 사셨다. ‘사는 방법’은 서울에서 시집온 어머니에게 더 많이 배웠다. 박 행장의 어머니는 청주에서 식료품과 잡화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늘 덤을 많이 줬다. 하지만 장사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밑지고 판 손님이 단골이 되고, 그 손님이 또 다른 사람을 데려오더라고요. 그게 어머니께 배운 ‘영업’이었던 것 같아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후하게 대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 말이죠. 인생은 ‘한 번의 딜’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 뒤로 늘 마음에 담고 살았습니다.”
경희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박 행장은 1979년 45명의 동기와 함께 입행했다. 금융권에 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경제학도들이 으레 한 번쯤 서류를 넣는 곳이 은행이었다. 박 행장보다 우수한 ‘스펙’을 갖춘 동료는 많았다. 그는 “제일은행은 ‘제일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통적으로 좋은 인재가 많았고 자부심도 컸다”고 회상했다.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지점에서 배웠다”
박 행장은 직장에서 ‘부끄러움’부터 배웠다. 첫 발령지는 서울 명동 중앙지점이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창구 보조’였다. 지점 청소, 동전 나르기, 주변 지역 통장 배달까지 잡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지인들이 찾아오면 창피함에 늘 고개를 숙였다. 큰 경쟁의식도 없었다. 은행에서 적당히 경험을 쌓다가 다른 일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마음이 다른 데 팔려 있으니 남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동기들은 본사의 중요 부서로 가거나 해외 지점으로 가는데 난 계속 ‘지점 인생’을 벗어나지 못했죠.”
열한 곳. 박 행장이 그렇게 20년간 거친 지점 수다. 지방에서부터 주요 기업이 몰려 있는 서울 중심지까지 안 가본 지점이 없다. “세운상가의 철물점부터 지방 공단 중소기업, 강남 한복판 대기업까지 모두 상대해봤죠. 남들은 편히 일하는데 나만 이렇게 고생하나 불평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수육과 문어가 한 접시씩 나왔다. 수육은 한우를 잘 삶아내 식감이 부드러웠다. 간장에 찍어 먹으니 간이 잘 맞았다. 큼지막하게 썬 문어는 참기름을 곁들이니 감칠맛이 돌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지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박 행장은 1990년대 초반 서울 테헤란로 지점 근무 시절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소위 ‘강남개발’ 시기였다. 은행 간 예금·대출 경쟁이 치열했다. 그만큼 사기꾼도 많이 꼬였다. 당시만 해도 ‘리스크 관리’라는 말은 잘 알지 못할 때였다.
“그럴듯한 외모에 좋은 언변을 갖춘 사기꾼을 많이 만났습니다. 대통령과 찍은 사진까지 보여주며 신용대출을 받아가려던 사람에게는 거의 속을 뻔하기도 했죠. 나중에 보니 9시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희대의 사기꾼으로 보도되더군요. 하하.”
IMF ‘위기’가 ‘기회’로
그 사이 노릇노릇한 생선전이 나왔다. 한입 베어 무니 계란옷의 고소한 맛과 담백한 생선살의 풍미가 잘 어우러졌다. 1997년 찾아온 외환위기는 은행에도 직격탄이 됐다.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로 불리던 한국의 5대 대표 은행이 차례로 무너졌다. 존폐의 기로에 섰던 제일은행은 미국 뉴브리지캐피털의 인수로 명맥을 이어갔다. 은행 주인이 외국계로 바뀌자 내부 분위기가 확 변했다. ‘줄’이나 ‘빽’은 소용없었다. 평가 기준은 단 한 가지, 업무 능력으로 수렴됐다. 2005년에는 영국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에게는 기회였다. 20년 동안 지점을 돌며 그만큼 발로 뛴 사람은 은행 내에 드물었다. 영국에 있는 본사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한국인 행장을 뽑기로 한 것이다. 박 행장은 본사 요청을 바로 수락하지 않고 역으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제일은행’이라는 이름을 다시 붙이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글로벌 금융회사가 한국에서 왜 안되는지는 한국 영업을 해본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SC은행의 비전과 철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경영 자율권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했죠.”
점포 30% 없애고 ‘디지털·비대면’ 승부
대표 메뉴인 국시가 나왔다. 박 행장은 “위암 수술을 받은 사람들도 이곳을 일부러 찾을 정도”라며 “우리밀을 써서 먹고 나면 더부룩함이 없고 속이 편해진다”고 했다.
그는 취임 이후 ‘하이브리드’를 생존 전략으로 제시했다. 박 행장은 “로컬과 글로벌의 만남, 한국 최고의 현지화된 국제은행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어차피 국내 ‘리딩뱅크’들과 전면전을 벌이기는 힘들었다. 그는 ‘비대면·디지털·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기업금융’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취임 후 전국 점포 수 중 3분의 1을 과감하게 줄였다. 대신 강점이 있는 자산관리 부문에 투자했다.
‘20년 영업통’의 전략은 주효했다. 취임 첫해인 2015년 2858억원의 적자였던 실적을 1년 만에 ‘턴어라운드’시켰다. 2016년 224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낸 데 이어 지난해에도 흑자를 이어갔다. “어차피 우리가 지점 영업으로 국내 은행을 이길 수는 없잖아요. 핵심 점포만 유지하면서 자산관리 분야에 집중하자는 단순한 전략이었죠. 앞으로 은행 간 경쟁의 핵심도 결국 비대면 영업 분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계 은행’이라는 말 사라져야 금융 발전
후식인 매실차를 받아든 그에게 ‘외국계 은행’에 대한 편견으로 어려운 적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외국계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야 국내 금융이 발전한다”고 했다. 박 행장은 “외환위기 때 받은 피해의식에서 이제는 벗어나 선진적인 시각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한치 앞을 알기 어려운 시기에 국내 시장에 들어온 것도 투자고 도전이었을 것”이라며 “글로벌마켓에서 도전하는 한국 금융회사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그런 틀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원 생활만 40년, 요즘 ‘밀레니얼 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에 관한 생각도 물었다. “직원뿐만 아니라 고객도 이제 밀레니얼 세대로 바뀝니다. 당장 은행의 주 고객이 아니라고 단기적 시각으로 보면 안 됩니다. 미래의 주 고객층이고 사회의 주 계층이 곧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은행도 거기에 눈높이를 맞춰야 하고요."
■SC제일은행은…
SC제일은행은 영국의 글로벌 은행그룹 스탠다드차타드(SC) 계열 은행이다. 1929년 설립된 조선저축은행으로 출발해 한국저축은행, 제일은행, 한국SC은행 시절을 거쳤다. SC는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뒤 2012년 ‘제일’이라는 이름을 뗐다. 사명에 다시 ‘제일’을 넣은 것은 2015년 박종복 행장 취임 후다. 이후 SC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씨티은행과 함께 외국계 은행의 큰 축으로 자리잡았다. 외화예금통장을 비롯해 자산관리 측면에서 SC의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게 강점으로 꼽힌다. 지난해 순이익은 2214억원이며 총자산은 65조148억원이다.
■박종복 SC제일은행장 약력
△1955년 충북 청주 출생
△1974년 청주고 졸업
△1979년 경희대 경제학과 졸업 제일은행 입행
△2004년 강남·부산 PB센터장
△2007년 영업본부장
△2009년 프리미엄뱅킹사업부장
△2011년 소매채널사업본부장(전무)
△2014년 리테일금융총괄본부장(부행장)
△2015년~ SC제일은행장 ■박종복 행장의 단골집 우리밀국시
사골육수에 담긴 국수 맛에 정·재계 인사도 단골
서울 혜화동 과학고에서 성북동 넘어가는 언덕에 자리잡은 ‘국시 명가’다. 뜨끈한 사골 국물에 손으로 반죽한 국수가 일품이다. 가격은 한 그릇에 9000원. 국수는 100% 우리밀을 쓰기 때문에 소화가 잘되고 식감도 좋다. 4시간가량 반죽을 치대 면발의 쫄깃함을 살린 게 특징이다. 1993년 문을 열어 27년째 한결같은 ‘국시 철학’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단골이 많은 이유다. 정·재계 인사들이 자주 찾는 식당으로도 유명하다.
상에 함께 내놓는 배추, 열무, 부추김치와 곁들여 먹으면 음식 궁합이 그만이다. 숟가락에 국수 몇 가닥과 진한 사골국물을 담은 뒤 매콤한 부추김치를 얹어 한입에 넣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국수뿐 아니라 수육과 문어도 우리밀국시의 인기 메뉴다. 수육과 문어는 각각 3만5000원이다. 두 가지를 조금씩 맛보고 싶다면 ‘반반’ 메뉴(3만5000원)를 시키면 된다. 큼지막하고 살이 통통한 생선전(2만5000원)도 이 집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정소람/정지은 기자 ram@hankyung.com